현대판 돈 버는 노예
‘아침 7시 30분 회의’
한두 달 지나가는 사태라고 생각했다. 쓰러져가는 회사를 인수하였기에 어려운 상황이 지나가면 정상출근으로 복귀하겠거니 했던 생각은 예상을 빗나갔다. 1년 내내 아침 7:30분 회의 시작, 퇴근 9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미친 짓이다.
퇴근하여 집에 도착한 시간 10시, 씻고 잠들기도 바쁘다. 자녀와의 대화는 고사하고 잠든 얼굴 쳐다보는 것만으로 쌓인 피로를 흘려보내야 한다. 흔히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퇴근하며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했던 말이 그냥 웃고 말 농담이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고 해도 누구 하나 힘들다 말할 수 없다. 조금만 힘들어도 회사 그만 다니겠다고 메신저로 통보하는 젊은이가 이런 속내를 알까?
산업화 시대에는 회사의 양적 성장을 위한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회사의 성장을 위해 쉬지도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냈다. 모든 일에는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고, 질책하며 “빨리빨리”의 조직문화가 성과로 이어졌다.
밥을 먹는 시간조차도 아까워 5분 만에 식판을 비우고 다시금 공장을 가동하던 피땀이 한국의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가장이라면 그래야만 했다.
“힘들다”
말하는 것은 사치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쫓겨날까? 굶어 죽을 자식 걱정에 누구 하나
“아니다”
라고 반기를 들지 않았다. 조직의 문화는 그렇게 곪아갔다. 그저 노예처럼 말없이 시키는 일이나 하는 것이 조직문화다. 오랫동안 곪아온 조직문화는 스마트 시대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 관례다. 부당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경영자 뒤에서나 입을 움찔거릴 뿐 눈치 보기 바쁘다. 이유야 어떻든 부작용도 속출한다.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데 왜 나서냐고 서릿발이 곤두섰다.
드디어 사건은 불거졌다.
“불량제품이 왜 이렇게 많아? 당장 가져가”
K는 협력업체의 항의 전화를 받는 것도 이력이 났다.
월요일 회의 시간, 생산라인의 동료 이 부장에게 공정을 좀 더 깐깐히 할 것을 주문했다. 불량제품이 많아 납품이 힘들다고 말이다.
동료인 이 부장의 대답은 안일했다. 생산부서 직원들도 열심히 하는데 더는 어쩔 수가 없다고 말이다. K는 이 부장의 속셈을 안다. 대충 시간 때우면 되는데 당신이 왜 나서냐는 거다. 그는 속이 탔다. 이런 식으로의 대처는 회사의 손해가 불을 보듯 뻔하다.
K가 다니는 회사는 벤처기업이다. 제품을 인정받기 위해 10년 동안 동분서주하며 열과 성의를 다했다. 회사가 안정이 되기까지 때론 제품 이상으로 밤샘근무를 하기도 하고, 제품 테스트를 위해 휴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당직을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경영자는 목표를 그려가며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할 것을 직원들에게 주문했다. 종일 가동되는 생산라인에서 제품은 쏟아지듯 나왔다. 불량제품이 나오더라도 많은 양의 완제품이 있기에 경영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직은 완벽한 듯 보였고 전술적 성과에 만족하며 성장했다. AS가 발생해도 대충 둘러대며 바꿔주면 그만이다.
벤처 기업답게 새로운 조직문화를 외치며 송년회를 대신하여 연극을 관람하기도 하는 등 성과와 직원들의 니즈를 높여가려 애썼다. 지역에서 우수회사로 인정도 받았고 수입과 지출이 흑자로 이어지며 안정세로 갈 무렵, 쓰러져가는 협력업체를 인수했다. 전술적 성과에 맛을 본 경영자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인수한 회사는 1~2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고 적자만 늘어갔다. 경영자는 내 가족의 회사라 생각하고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했다. 조금 더 열심히 해줄 것을 독촉했다.
'7시 30분, 회의 시작'이라는 새로운 조직시스템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K는 생산라인의 불량제품에 대한 납품회사의 불만들을 회의 때마다 전했다. AS가 자주 발생하는 문제도 불량제품을 줄인다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이다. 생산 팀 이 부장은 문제없다는 식이고 결국 경영자는 그에게 불량 문제를 해결해 보라고 지시했다.
문제를 제안했다는 이유로K 는 새로운 업무를 떠안게 되었다. 모른 척하자니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고, 거절하자니 거래처 납품이 줄어 월급이 제대로 나올지 불안하기만 하다. K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경영자의 지시를 거절할 수도 없고 회사가 망해가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쥐어짜다 보면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겠으나 점점 많아져가는 업무가 부담스러웠다.
밤잠을 설치기를 여러 날,
한 달만 맡기로 하고 생산라인의 시스템을 재정비하며 불량제품 줄이기에 매진했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모두 퇴근한 후에도 기계를 점검하고 일일이 제품을 검수한 후에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유난히 밤하늘의 별이 반짝인다. 아침 출근 때도 보았던 그 별이다. 별이 김준호에게
"오늘도 지금 퇴근하는 거야?"
하고 인사하는 것만 같은 느낌은 무엇일까? K가 헛것이 보이는 건지 정말 별이 말을 한 것인지...
별 보고 출, 퇴근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생산라인의 시스템을 재정비하며 불철주야 불량제품 줄이기에 매진했던 김준호의 수고는 눈에 띄게 나아졌다. 약속한 한 달이 되었기에 이제 이 시스템을 생산 팀 이 부장에게 넘겨주면 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경영자는 K에게 생산 팀을 계속 맡아달라고 했다. 이 부장에게 생산 라인을 돌려주겠다고 말은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납품회사의 불만도 사그라져 별 문제없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는 어떠한 저항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돌아오는 건 업무가 너무 많다고 웅얼거리는 자기의 목소리만 메아리 칠 뿐이다. 칸막이 너머 이 부장의 표정이 가관이다. 자신의 일을 빼앗아 갔으니 꼴좋다는 표정으로 쏘아볼 뿐 경영자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일이니 잘해 보겠다든지, 노력해 보겠다는 그 어떤 말도 벙긋하지 않았다.
K의 어깨가 오늘따라 더 뻐근하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근로계약서가 떠올랐다.
K는 회사 앞에서 을이다. 경영자인 갑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일의 즐거움은 고사하고 동료 간의 협조도 기대할 수 없다. 조직은 성과가 최고일 뿐, 이윤만 남기면 그만인 것이다.
파트너십에서 공동의 문화적 가치나 역사가 사라지게 되자,
돈이 회사를 결속시키는 핵심가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만들어진 결속력은 쉽게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무엇이 성과를 이끄는가?’ 인디애나 대학 법학과 교수 ‘윌리엄 핸더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