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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lee Oct 05. 2020

기분 좋아지는 소설을 읽다

정세랑 작가 <시선으로부터,>

오랜만에 기분 좋은 소설을 읽었다.


올해 작은아씨들,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2020),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에 이어 소설은 5번째다. 이들의 공통점어둡지 않은 분위기, 여러 등장인물, 자기 색채가 강한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 원래 내 취향인지, 아니면 요즘 내가 '주관이 뚜렷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이런 소설에 끌리는 건지는 두고 봐야 알 것 같다.


<시선으로부터,>는 예술가 고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그녀의 가족들 - 딸, 며느리, 손녀, 아들, 손자, 사위 - 이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는 독특한 이야기다. 매 챕터 심시선 여사가 남긴 글, 인터뷰로 시작하고, 이어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가족들은 시선의 제사상에 올릴 물건, 추억을 찾기 위해 각자 여행을 한다.


이 소설의 매력 포인트는 크게 3가지.


1. 닮고 싶은 인물들.

맨 앞 장에 가계도가 나올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난정이다.

딸이 아팠던 시기에 마음 붙일 곳이 필요해서 책을 읽기 시작한 난정.

아픈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 져서,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 보호법이었다. 언제나 뭔가를 쥐어뜯고, 따지고, 몰아붙이고, 먼저 공격하고 싶었다. 대신 책을 읽는 걸 택했다.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 한 게 없었다.
*출처: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인생의 위기를 책으로 극복한 난정은, 말을 아낄 줄 알고 남편과 딸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재미는 없지만 대화 상대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바라는 어른의 모습. 난정은 젊은 시절부터 단단했다. 스케이트를 배우기로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는 그런 사람.


사고를 겪기 전의 화수도 매력적이다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게 화수였다. 균형 감각이 좋았다. 온화하면서 단호한 성격. 과거를 돌아보되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되 틀어져도 유연한 태도. 살면서 만나는 누구와도 알맞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판단력, 일과 삶에 에너지를 배분하는 감각...... 이를테면 요새 유행하는 명상 앱의 차분한 목소리를 닮았던 것이다. 
*출처: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명상 앱을 닮은 사람이라니. 어쩜 이렇게 멋진 표현이 있을까?


소설에서 비중은 작지만, 집안 남자들 - 태호, 명준, 규림 - 도 기억에 남는다. '기세 좋은 여자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느낄 법 한데, 모나게 굴지 않고 조용히 할 일을 한다. 타고난 성품에서든,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든, 분명 따뜻한 사람들일 것이다.    



2. 다양한 직업 일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

유명 예술가의 딸, 손녀들답게 창의적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은 나름의 고민을 안고 있다. 특히 영화나 게임 속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우윤의 이야기는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워커홀릭들만이 관리자가 되는 것인지, 관리자가 되면 워커홀릭이 되고 마는 것인지 우윤은 궁금했다. (중략) 일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길들여지지 않는 괴물 늑대와 같아서, 여차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물 것이다. 몸을 아프게 하고 인생을 망칠 것이다. 그렇다고 일을 조금만 사랑하자니, 유순하게 길들여진 작은 것만 골라 키우라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출처: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사십 대 후반의 웹 디자이너 경아의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능력이 아닌 좋은 체력 덕분에 사십 대 후반까지 버텼다고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일을 좋아하는 게 느껴진다. 그녀가 싱글로 살아가는 언니 명은의 가벼운 삶, 여유를 부러워하는 점도 솔직해서 좋았다. 


과연 일과 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평범한 직장인에게 이런 고민은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지만, 사실 회사 이름과 과장 타이틀을 빼면 나를 지탱해 줄 것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3. 적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언제나 거기 있어줄 것 같은 가족들. 

언젠가부터 명절, 어버이날, 생일이 부담스럽다. 축하한다, 고맙다, 행복하자,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게 낯 뜨겁고 우리 집이 남들처럼 평범하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는 날이라 씁쓸하다.

소설 속 심시선 여사는 평범하지 않다. 그 옛날, 유럽에서 공부하며 외국인 애인을 두었고, 결혼도 두 번 하여 성이 다른 자녀가 무려 넷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는다. 함부로 대하거나 뒤에서 욕하지도 않는다. 가족이기에 서로 기대하고 기대를 받는 이는 당연히 그걸 무너뜨리지만,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소설 속 심시선 여사의 자녀들도 사연이 있고,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부러웠다. '잘 나가는' 마/머니 자체가 든든한 빽이지 않나. 집안 내력인 예술적, 언어 감각 기세 좋은 성격까지 물려받았고 말이다. 게다가 인생에 크고 작은 위기가 닥쳤을 때 나에게 꼭 맞는 방식으로 위로와 지지를 보내줄 자매, 사촌, 조카들 있다니.  



오랜만에 읽은 유쾌한 소설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하와이를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소설보다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주는 에세이, 자기 계발서를 읽었는데, 역시. 좋은 이야기는 다르다.

하와이로 떠나고 싶은 사람, 하와이를 추억하는 사람, 이상한 콘텐츠로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은 사람, 기분 좋아지는 책을 찾는 사람에게 <시선으로부터,>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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