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일주일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식욕을 완전히 잃어서 체중이 2킬로 가까이 줄었고, 시간 개념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려서 나는 밤이 되어서야 정신이 온전해졌다. 꾸역꾸역 잡생각들이 들어찼고 어김없이 꿈을 꾸고 허겁지겁 일어나 시계를 보면 항상 2시나 3시였다. 그러면 나는 콜드플레이 노래를 들으면서 웩웩거리며 감정을 게워냈다.
나는 친구들에게 내 연애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었다. 일단 남의 연애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면 들어주기 귀찮고 짜증 나는 이야기이고, 나쁜 이야기이면 한낱 가십거리로 치부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락이 없던 그의 경우에는 이미 의대 동기들 사이에서도 몇 번이나 이름이 오르내렸던 나름의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내가 친구들에게 말한다면 아주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오롯이 그 슬픔을 혼자 감내했다.
단 한 번 만난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빠질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분명 만유인력이 존재한다.나는 그를 통해 실감했다. 첫눈에 반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첫 만남에 반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내가 그에게 끌린 것은 아주 순수한 감정만은 아니었다. 첫 번째로 그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고, 두 번째로는 그가 화제의 중심이며 다들 그에 대해 문란하다고 욕을 하면서도, 그와 사귀는 여자를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흔히 이야기하는 알파 메일 alpha male이었는데, 병원에서 일을 할 때도 이러한 서열은 확실히 드러났다. 그가 이야기하면 교수님들까지도 쉽사리 핀잔을 주거나 혼내지 못했다. 그러니 다른 전공의들이나 인턴들이 형, 형 하면서 거의 복종하다시피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사람이 나와 만난다면?
정말이지 입 밖으로 내기조차 부끄럽고 천박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주목을 받고 부러움을 사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 봐요, 이런 남자가 글쎄 나를 좋아한다네.
그러나 사실 그에게 끌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나를 쳐다보는 눈 때문이었다. 아주 맹목적인 눈빛. 잘 봐봐, 내가 너를 이렇게나 원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만 마주하면, 그에게 절대로 마음을 주지 않겠다던 다짐까지도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또 하나는, 영화 때문이었다. 우리는 첫 만남에서 압생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독한 초록빛의 아구아밤 몇 잔을 앞에 두고 내가 그에게 말했다. 압생트 같아요. 그러자 그가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압생트를 알아? 어떻게? 그럼 내가 대답했다. 토탈 이클립스에서 봤어요. 그러면 그는 더욱 놀란 눈을 하고 또 물었다. 토탈 이클립스를 봤어? 그때 나는 술에 취해서, 아주 귀찮다는 듯이, 뭘 그리 놀라냐는 듯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술기운에 꾸벅꾸벅 졸면서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걸 들었다.
"네가 진짜로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그러나 그는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었다.
일주일 후, 병원 구석에 위치한 학생 실습실에서 동기들이 샌드위치를 먹는 것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 알림이 떴다.
'내일 만날 수 있어?'
그의 연락은 아주 짤막했다. 나는 그가 내게 둘러주고 갔던 빨간색과 검은색이 교차된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답장을 보냈다.
'네.'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일주일씩이나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 괘씸해서 안된다고, 내가 왜요? 내가 그쪽을 왜 만나요? 이렇게 답장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우리는 어디서 몇 시에 만날지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홍대 쪽에서 보자. 7시쯤.'
'네 괜찮아요.'
'나 이제 일하러.'
그리고는 그는 사라졌다. 남겨진 나는 도대체 이게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의 말투인가? 애초에 좋다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있나? 30대가 되면 원래 이렇게 되는 건가? 등등의 아주 많은 생각들을 했다.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가 없어서 내 안에 감정들이 켜켜이 쌓였다.
이터널 선샤인
그를 마주한 순간 갑작스레 실감했다. 내 인생에, 첫사랑 이후로, 그를 넘어설 수 있는 사건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름 세 글자만으로 나를 떨리게 하는, 상상만으로 내 눈썹을 쳐지게 하는, 이토록 수많은 글들을 토해내게 하는. (그러나 나는 정확히 3년 뒤 이 또한 나의 오만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홍대 어느 카페와 펍의 중간쯤 되는 가게에 들어가 앉았다. 그곳은 1층이기도 하고 지하 이기도했는데 벽돌로 된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서 <이터널 선샤인>이 상영되고 있었다. 온갖 담배 연기와 술기운 때문에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더욱 붉고, 더욱 파랗고, 예뻤다.
"이터널 선샤인 봤어?"
"아니요."
나는 사실 다섯 번도 더 본 영화였지만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그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리고는 나를 쳐다봤다. 지난번 대화를 통해 나는 아마 영화나 책에 있어서 엄청난 잡식 주의자이자 대식가라는 이미지를 그에게 주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술에 취해서 평소의 나답지 않게 첫 만남에 나의 취향에 대해서 읊어댔으니까.
나는 그와 나누고 싶은 말들이 정말 많았지만 일부러 말을 아꼈다. 내가 말을 할수록 내가 그보다 훨씬 어린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았다. 나는 우스워 보이기 싫었다. 나도 이 관계에서 어느 정도 주도성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실제로 내 맘은 이미 그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해?"
이 시기에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그는 자기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대체 왜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왜 자꾸 너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되지?"
그는 심지어 자신의 지난 연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가 그의 누나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바로 이 날이었다. 그는 약간 찌푸린 표정으로 자신에게 누나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한테 누나가 있는데, 친하지는 않아. 그런데 대학을 잘 갔어. 응. 네가 예상하는 바로 거기. 그래서 내가 좀 힘들었어."
"오빠가 힘들었던 걸 누나도 알았어요?"
"글쎄? 누나는 아마 몰랐을 걸.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
"오빠는요?"
"응?"
"오빠는 누나한테 관심이 있었어요?"
"아니. 그냥 솔직히 좀 재수가 없었지. 맨날 깔보듯이 지나가고는 해서."
그가 처음 보는 무서운 표정을 하고 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나는 괜히 그의 누나에 대해 캐물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자 나는 흠칫 놀랐다. 내가 깜짝 놀란 것을 들켰을 것 같아서, 나는 부끄러워졌다.
"너, 진짜 못되게 생긴 거 알아?"
그가 갑자기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다지 호감을 주는 인상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학창 시절에도 오해를 많이 받았다. 나와 친한 친구는 내 매력 중 하나가 처음 보면 엄청나게 싸가지 없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약간 싸가지 없는 것이라고 깔깔대며 말하기도 했다.
"뭐야.. 짜증나.."
친구들끼리야 웃으며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좋아하는 남자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근데 나는 그래서 좋아. 아무한테나 마음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 두 문장은 내 가슴에 들어와 콕 박혔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가 아무나인지, 그에게 마음을 주어도 되는지. 마음을 주는 순간 그는 내가 싫어질 것이 아닌지.
내가 멍하니 그의 어깨 너머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자 그는 '안되겠다'하며 내 옆자리로 건너왔다. 우리는 나란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짐 캐리가 마스터베이션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내 눈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