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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May 15. 2020

10. 역겹고, 아름답고, 바스러지는 기억-2

이상한 일주일


목요일


우리 병원은 각 층마다 대체로 4개의 병동이 있었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중앙 복도의 양 옆으로 2개의 병동씩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각 병동은 서로 마주 보는 모양새였다. 말하자면 X자형이었는데, 나는 친구들과 상동 염색체 모양의 병동이라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리고 X자형 병동 사이의 빈 공간에는 지하 1층부터 옥상까지 이어지는 원통형의 공간이 있었고, 병동 복도에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이 공간을 내다보면 누군가의 손길로 정성스럽게 가꾼 상록수들이 보이고는 했다.


그 날 나는 바로 그 병동 복도의 커다란 창틀 중 하나에 기대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턴 업무 중에 하나로 회진 시에 교수님들과 전공의들을 안내하는 일이 있는데, 회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회진 때 환자들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병동에 이야기해서 산책 나간 환자들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하고, 다시 한번 병동을 한 바퀴 돌면서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안내해야 할 병실들 위치를 재차 확인한 뒤에 시계를 보자 5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창틀에 앉아서 한숨 돌리며 밖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고 있어서 나무들은 형형색색의 전구들로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병원은 크리스마스 챙기기에 아주 열심히여서, 이미 병원 로비에는 산타 클로스 인형까지 등장해 있었다.


"어?"


멍하니 앉아서 살짝 아파오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번쩍거리는 나무들 위로 하얀색 솜털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올해 첫눈인가? 싶었는데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지나가면서 첫눈을 이렇게 본다며 한 마디씩을 했다. 간호사 스테이션에서는 끊임없이 벨소리가 울리고, 이송 요원들이 베드를 끌고 지나가는 소리, 학생 실습생들이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 holter EKG (심전도)를 달고 있는 환자들에게서 나는 기계음들이 뒤섞여 병동 복도는 아주 소란스러웠는데도, 창문을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내리고 있는 눈을 보자 나는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졌다. 심지어는 꽤나 이 순간이 낭만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첫눈.."


나는 작게 읊조리며 휴대폰을 들어 짧은 동영상을 찍었다. 첫눈인데도 꽤나 굵은 눈발이어서 동영상으로 찍어두니 마치 눈 내리는 장치를 해 둔 오르골 내부를 찍은 것 같이 보였다. 잠시 그렇게 감상에 취해 있던 나는 카카오톡 알림 소리에 기분이 와장창 깨지고야 말았다.


'교ㅅ님 오ㅅㅕㅅ어?'


풉. 급했나 보군. 그는 오타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런 엉망진창인 카톡을 보낸 것을 보니 헐레벌떡 병동으로 올라오는 중인 모양이었다. 지난 몇 주간 보아온 그와, 최근 며칠간 본 그가 좀 달라서 나는 신기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정말 답지 않은 짓을 하는군.


'아직요. 아직 윗년차샘들도 안 왔어요. 천천히 오세요.'


나는 그렇게 답장하고는 잠깐 망설이다가 아까 찍은 첫눈 오는 동영상을 보냈다.


'첫눈 옴.'


정말 나답지 않은 짓이었다. 그가 그 답지 않은 짓을 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첫눈 때문이었는지, 나는 갑자기 그런 간질간질한 짓을 했다. 어찌 보면 내 또래 여자애들이 살짝 호감이 있는 이성에게 할 수 있는 흔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나처럼 겁 많은 성격에는 당치도 않은 짓이었다. 나는 입학 이례로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이성에게  먼저 연락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예과 1학년 때 너도 나도 선배들에게 연락하여 밥 약속을 잡을 때도, 나는 그 누구에게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서.


나는 외모에 자신이 없었는데, 이건 단순히 예쁘고 못 생기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 좀 하자가 있는 얼굴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남들은 눈동자가 커지고 싶어서 보통 크기의 눈동자인데도 써클렌즈를 끼는 상황에, 나는 파충류처럼 눈동자가 작았다. 그런데 눈은 또 희한하게 커서, 그냥 보아도 째려본다는 오해를 받았다. 입술은 우스꽝스럽게 두꺼웠다. 이 점 때문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놀림을 받아올 정도로. 전반적으로 내 얼굴은 선이 굵었고, 인상이 강해서 조금만 표정을 굳혀도 화났냐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친한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가 아니면 거의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어색하게 인사하고는 딴청을 피웠다. 흔한 20대 여자 아이들이 그렇듯이, 외출 후에 잠들기 전 아무렇게나 머리를 묶고 세수한 뒤에 거울을 보면 어라? 좀 괜찮나? 싶다가도 다음 날 공들여 화장한 얼굴로 지하철 차창에 비친 모습을 보면 못난이가 따로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가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선배들에게나 동기들에게나 먼저 다가가지를 못했고, 오로지 나에게 먼저 말을 걸고 친근하게 대해준 사람들과만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이 아닐지 몰라도, 이런 내가 일적으로 알게 된 누군가에게, 아무리 조금 친해진 사이라 해도, 그런 동영상을 보낸다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도무지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아 뭐야 첫눈 너랑 처음 봤어 짜증 나."


내가 동영상을 보내 놓고 혼자 아 왜 그랬냐? 왜 그랬어? 미쳤냐? 이러면서 자책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다가와서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것 같아서 나는 좀 안심이 되었다. 그래 뭐, 친한 선후배 사이에 이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뭐. 이상하게 안 보였을 걸.


"아 저도 짜증 나요. 뭐래."


나도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멀리서 교수님이 가운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오는 게 보여서 나는 그를 장난스럽게 한 번 째려봤다가 병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요일의 반


"M, 오늘 마지막 날이야?"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H선배가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내게 물었다.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어.. 네."

"야 어쩌냐? 너 페어웰 해줬어야 하는데 다음 주인 줄 알았어. 어떡하냐 진짜."

"아 뭐 그런 걸로. 괜찮아요. 그냥 다음에 만나면 더 맛있는 거 사주세요."


나는 다년간 연습한 아주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웃음 덕에 나는 곤란한 순간들을 많이도 넘길 수 있었고, 그동안 받아왔던 싸가지 없다는 오해 - 물론 실제로 좀 싸가지 없는 면도 있다 - 를 다소 불식시킬 수 있었다. 나는 며칠 간 과 지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전공의 선발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무려 3 대 1의 경쟁을 뚫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H선배가 내가 전공의 면접 때문에 잔뜩 걱정하는 것을 알고는 정신건강의학과 선배에게 나에 대해 잘 이야기해준 사실을 알았기에, 나는 실제로도 그에게 섭섭한 마음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훨씬 컸다.


그 날 오후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가 내게 쭈뼛거리면서 말을 걸기 전까지는.


"야."


그가 이상하게 좀 어색한 표정이어서 나는 의아하게 여기면서 대답을 했다.


"네?"


그러자 그가 좀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내가 이따 페어웰 챙겨줄게. 뭐라도 먹자."


뭐여.. 같이 밥 처음 먹는 사이처럼 갑자기 왜 저럼? 나는 갑자기 그가 수줍은 소년처럼 굴자 좀 웃기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뭐 어차피 퇴근하고 할 일도 없어요. 근데 저는 내일도 출근해야 됨."

"어 알아. 술은 별로 마시지 말자."


내가 너랑 술 퍼마실 일 있냐. 걱정 마시게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와 나는 유난히 단 둘이 밥 먹을 기회가 많았는데, 항상 이유 없는 식사는 없었다. 밤늦게까지 같이 서류 작업을 하다가, 내가 그의 개인적인 일을 도와주게 되어서, 그냥 일이 늦게 끝나서 등등.


*


그렇지만 내가 가끔 좀 의아하게 여겼던 순간들이 몇 번 있었는데, 한 번은 다른 윗년차 선배까지 세 명이서 영화를 보러 갔을 때였다. 우리는 스릴러 영화를 본 뒤에 재밌다고 떠들며 피자를 먹으러 갔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랬더니 맞은편에서 그와 나를 보던 선배가 눈을 좌우로 굴리더니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너네 둘 잘 어울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잘난척쟁이 어린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혀 타격이 없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장난스레 얼굴을 찌푸리며 그를 보자 미동도 없이 피자만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답 없이 먹기만 해서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휴, 오빠 그런 말 하면 이 분이 엄청 짜증 내실 걸요. 어찌 감히 저를 이 분에게 갖다 붙이겠습니까."

"아냐 아냐 진짜 잘 어울려."


아 그만하라고. 저 사람 정색하는 거 안 보이냐고. 나는 그의 표정이 좀 굳어가는 것 같아서 재빨리 말을 돌리고는 종업원을 불러 피클을 좀 더 갖다 달라고 말했다. 그게 저렇게까지 표정 관리를 못할 말인가 싶어서 좀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나 역시 그에게 아무 감정 없었기에 나는 훌훌 털어버렸다.


또 한 번은 왜였는지 그와 내가 둘 다 늦게까지 병원에 남아있던 날이었다. 나는 배가 고파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숨기려고 배 부분을 꾹 누르고 있었는데, 그가 옆으로 와서 깜짝 놀랐다.


"뭐 먹을래? 저녁?"

"아 좋죠 좋죠. 배고파 죽는 줄."


나는 진심으로 반가워서 그렇게 말했다. 그가 피식 웃더니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음..."


나는 식성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메뉴들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있는 병원은 대학교 부속 병원이었기에 주변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식당들이 많이 있었고, 그중 몇몇은 내가 학생 때부터 단골로 가던 곳들이었다.


"전 부대찌개."

"헐.."


내가 거의 망설임 없이 부대찌개를 말하자 그가 눈썹을 찡긋하더니 다시 말했다.


"아니 좀 그런 거 말고 맛있는 거."

"전 그게 제일 맛있는데요. 거기 음료 무한 리필도 됨."

"아 돼지냐.."


그가 기가 차다는 듯이 그렇게 말해서 나는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살이 많이 쪄서 전에 없는 몸무게를 갱신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내가 살이 찌 말든 무슨 상관이신지?


"너 초밥 좋아해? 스시?"

"뭐 당연히 좋아는 하죠. 근데 이 근처에는 다 별로던데."

"좀 더 나가서 먹으면 되지."


아 대박 귀찮아. 빨리 먹고 집에 얼른 가고 싶다고요. 꼰대세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나는 사회적 웃음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아 뭐.. 오빠만 괜찮으면 저야 좋죠."

"그럼 너 옷 갈아입고 10분 있다가 후문 쪽으로 나와. 늦으면 나 그냥 간다."


문득 내가 뭘 입고 있나 내려다보니 병원에서 입는 근무복 차림이었다. 이거.. 며칠 째 입었더라?라는 생각에 좀 머쓱해져서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채 인턴 숙소로 향했다. 내 방 안에 들어갔더니 아직도 퇴근하지 못한, 아니 당연하게 당직을 서고 있는 동기들이 주렁주렁 있었다.


"퇴근 퇴근?"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유머러스해서 내가 좋아하는 여자 동기 K가 나를 보고 물었다.


"노노.. 전공의쌤이랑 밥 먹으러 가야 됨."

"누구?"

"J가 항상 말하던 그분."

"아 헐. 진짜? 뭐 먹으러 가는데?"

"몰라 그냥 좀 나가서 초밥 먹을 거 같은디."


내가 그렇게 말하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K가 내 눈 바로 앞에까지 와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이랑 초밥을 먹으러 간다고? 이 앞에서도 아니고?"

"이상한 생각 사절이요."


나는 옷장에 걸려 있던 스웨터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킁킁거리다가 머리를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이 너 좋아하는 거 아냐?"


나는 머리를 쑥 빼고는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큰일 날 소리 말어. 그 사람이 맨날 나 돼지라고 뭐라 하는데. 그 얘기 들으면 나 죽일 것 같다."

"좀 이상한데.."

"아냐 내가 알기로 여자 친구 있어."


나는 그렇게 말을 끊고는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헉 15분 지났다. 헐레벌떡 후문 쪽으로 달려가니 그의 차가 보였다. 나는 막상 조수석에 나란히 앉으려니 좀 쑥스럽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K가 이상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문을 열며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을 했다.


*


그리고 내가 그 과를 돌던 마지막 주의 금요일, 나는 퇴근 후에 다시 그 후문에서 그를 만났다. 술을 약간 할 생각이어서 그도 차를 가지고 나오지는 않았다. 우리는 약간 거리를 두고 근처 이자카야까지 느릿느릿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내 인턴 성적에 대한 이야기, 왜 정신과에 가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 어쩌다 우리가 친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며칠 전 그가 내게 보였던 냉랭했던 모습은 사라진 것 같아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마찬가지로 이번 주 내내 뭔가 간질간질하게 나를 자극하던 설렘도 조금은 사그라들었는데, 그가 계속해서 강조해서 '넌 진짜 좋은 후배다'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나를 불편하게 했던 두근거림은 그저 착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져서, 되려 마음이 편해졌다. 돌이켜 봐도, 그 역시 그 날 무언가를 의도하거나 계획했다기보다는, 그저 아쉬운 마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우리 둘 다 너무 방심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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