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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은현 변호사 Oct 02. 2024

시를 필사하는 시간 9-누군가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올해 유난했던 여름 가을이 오는 기척도 없이 가버리고, 곧 겨울이 오는 모양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산책했던 적당한 온도의 날 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갑자기 책장에 있는 류시화 시인님의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다 시 한편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냥 가끔씩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가는 그런 시들이 있다. 마음 가는 대로 책을 펼쳐 들고 시 하나를 필사했다.


시에 그어져 있는 밑줄을 보니, 시집을 구매했을 그 당시에도 이 시가 마음에 들어왔던 것 같다.







누군가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할 말이 없거나 말주변이 부족하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말하는 것의 의미를 잃었을 수도 있고

속엣말이

사랑, 가장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에서

머뭇거리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 안에서 홀로 견디는 법과

자신 안에서 사는 법 터득한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겨울이 그 가슴을 영원한 거처로 삼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단지 봄이 또다시

색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노래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새들이 그 마음속 음표를 다 물고 갔다고

넘겨짚어서는 안 된다

외로움의 물기에 젖어

악보가 바랜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 동행 없이 혼자 걷는다고 해서

외톨이의 길을 좋아한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길이 축복받았다고 느낄 때까지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었으나

가슴 안에 아직 피지 않은 꽃들만이

그의 그림자와 동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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