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으로 던져진 마음은 수면 위를 향해 맹렬히 발차기하지만 부력 없는 돌덩이처럼 금세 어둠의 밑면에 도달했다. 뇌암이라는 단어는 단숨에 내 목을 베었고 떨어져 나간 머리는 눈만 껌벅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렇게 암은 삽시간에 내 마음까지 잠식했다. 망연해진 정신은 어디 두고 내 몸은 서울행 기차에 앉아 있었다. 주변만 분주했다. 엄마는 딸이 서울대학교병원 의사로 있는 사돈 친척에게 전화를 걸었고 오빠는 삼성세브란스에서 일하는 간호사 누나에게 연락했다. 윤양도 몇 년 만에 울산아산병원에 의사로 있는 동창에게 전화했다. 어색한 인사 뒤로 본론이 빠르게 이어졌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부끄러움이나 체면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메이저 병원의 대기는 엄청났다. 기다리면서 부산에서의 검사가 오진이 아닐까 하는 공허한 상상을 했다. 몇 시간 뒤 의사는 mri를 다시 찍자고 했고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진이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종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나라 빅 5에서 그렇다고 하니 이제 도망갈 데는 없었다. 다만 개두술만은 피하고 싶어서 열심히 찾아본 인터넷 지식으로 감마나이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처음에 권도훈 교수님께 진료를 신청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mri 결과 나는 개두술이 불가피했다. 의사는 곧장 개두술을 전문으로 하는 김정훈 교수님께 나를 이첩했고 마지막 진료에 겨우 끼워 넣어져 운 좋게 당일에 면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이곳에서 이 악성 신생 물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담당의는 차분히 이름부터 알려주었다. 상의세포종이라고 했다. 이는 중추신경계에 생기는 신경교종으로 주로 소뇌와 4 뇌실에 발생한다. 특히 성인보다 소아에게 많이 발현되는 질환으로 전체 뇌종양에 3% 정도인 희귀 암이다. 흔히 볼 수 없는 암이고 더욱이 성인에게는 잘 발생하지 않는 종양이 하필 나에게 생긴 것이다. 다른 종양처럼 양성과 악성이 있는데 악성인 경우는 척수강으로 전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척추 mri 검사도 필요하다고 했다. 내 종양이 모양상 악성이라 척추 검사를 꼭 하자고 하셨다. 순간 암세포가 이미 온몸에 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뒤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는지 돌아봤다.
유한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진에게 만일은 늘 대비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환자에게 항상 최악을 설명해야 하는 게 숙명인 걸 알고는 있지만, 따뜻한 말투와 미소에도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매번 심장을 도려냈다. 모진 말의 퍼레이드는 곧 절정에 달했다.
4 뇌실은 두개골 뒤 아래쪽에 위치해 있고 척추로 이어지는 척수 중심관과 연결돼 있는데 현재 여기서 자란 종양이 척수액이 흐르는 길을 2/3 가량 막고 있어서 척수액은 남겨진 틈으로 간신히 흐르고 있었다. 혹여나 이 관이 완전히 막히면 뇌부종으로 뇌압이 상승해 상황이 위급해질 수 있다는 거였다. '뇌가 본래의 자리를 이탈해 척수액에 와류하는 것 같은' 내 느낌이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수술이 시급했다.
문제는 의사의 1년치 수술 일정이 다 잡혀 있어서 위급하지 않은 환자에게 양해를 구해 수술 날짜를 양보받아야 했는데 그것도 빨라야 두 달 뒤였다. 일정표를 하염없이 보던 의사가 입을 떼었다. 본인 환자는 아니었지만, 몇 년 전 비슷한 케이스로 수술을 기다리던 환자가 결국 부고를 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두 달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하셨다. 젊은 환자의 악성 종양은 노인보다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나는 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담당의는 1차 수술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