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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Oct 24. 2021

3년째 낯선

평창

 구름 한 점 없는, 정말로 한 점도 없는 가을 하늘이다. 오늘 같은 날씨엔 정말 가만히만 있어도 괜히 설레고 기분이 좋아진다. 무더운 여름,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다가올 혹독한 추위를 대비하는 약간의 휴식시간 같이 느껴져 마음이 노곤해진다. 좋은 일들 때문이긴 했지만 몇 주간 쉴틈 없이 흘러가던 내 일상에 아무 약속 없는 일요일의 평창이다. 이 날씨와 몹시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부족한 잠을 채우고 밀린 집안일을 하려 했지만, 이런 날씨에 집에만 있을 순 없을 것 같아 일단 밖으로 나서기로 한다.

 

 조깅을 하면서 폐 깊숙 깊숙이 평창의 좋은 공기를 빨아들인다. 땀은 나자 마자 가을 바람에 말라버린다. 약간 추울 수도 있는 날씨였지만 햇살이 워낙 따뜻해서 괜찮았다. 운동을 대충 마치고 집에 들어가던 길에 산책로 근처 집에 사시는 할머니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자식들이 잘 커서 약사와 선생님이 되셨다고 한다. 손자 손녀도 공부를 잘해 서울대와 이화여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걱정이 없으시겠어요~"


"병원 가면 신경성이라는데 속이 항상 안 좋아. 약 먹어도 똑같애."


 할머니는 요즘 부쩍 속이 자주 쓰린게 걱정이다. 혹시 스트레스 받는 일 없냐 물어보니, 영감이 제일 큰 스트레스 였다고 한다. 3개월 전에 돌아가셔서 집 근처에 묻어 주셨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영감 죽고 나서부턴 속 쓰린게 좀 덜하다고 한다. 영감이 속을 썩여서 속이 아팠던 가보다며 웃으신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겠다.


 늙어서 안 아픈 곳도 없고 얼른 죽어야지. 하는 할머니 맥을 짚어드리고는 너무 건강하셔서 100살까진 거뜬히 사실 것 같은데요? 해드렸다. "에유 징그러워!"라고 하시면서도 해맑게 웃으시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참 모를 일이다.



 빨래를 널어놓고 이불빨래까지 돌려놓고는 집을 나선다. 근처 전망이 좋은 카페에 가서 경치를 구경하며 책을 읽을 계획이다. 책은 곁들일 뿐 메인 메뉴는 이 좋은 날씨의 평창 경치이다. 10분동안 달려간 카페는 오늘과 내일 휴업이라고 한다. 근처에 다른 카페를 가려면 차로 20분 정도는 더 달려야 할 것 같다. 드라이브 하기에 워낙 좋은 날씨여서 그런지 오히려 더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공보의 생활이 끝나간다. 학생으로서 인턴으로서 쉼없이 달려왔던 27년과 앞으로 다가올 바쁜 나날들 사이에 딱 3년. 날씨 좋은 일요일 평창같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가려던 카페가 문 닫았어도 큰 문제가 없었던, 목적지보다 가는 길이 더 목적이었던 오늘처럼 사실 인생의 모든 일들도 사실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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