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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우 Sep 04. 2022

첫사랑에 성공만 했어도 저만한 애가 있을 텐데…

출생의 비밀

카페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대치동 학원가는 같은 시간 홍대입구나 강남역 못지않은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학생들을 가득 품은 학원 건물을 밝히는 불빛들, 학원 앞에 줄지어 서있는 학부모들 차량의 헤드램프 불빛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이십 년도 넘었고 자손도 없는 내가 이곳 학원가에 앉아 있는 이유는 조카를 학원에서 픽업해 달라는 누나의 명령 때문이었다. 십오 년 전 매형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던 누나는 그곳에서 조카 연이를 낳고  살더니, 돌연 조카에게 최고의 교육환경을 제공하겠다며 작년에 귀국했다. 불과 귀국 일 년 만에 누나는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주인공들 못지않은 열혈 대치동 엄마가 되어버렸다.


‘내가 첫사랑에 성공만 했어도 지금 저만한 애가 있을 텐데…’


창밖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교복 입은 앳된 학생들을 보고 있으니 구태연한 말이 절로 나왔다. 지금은 기억도 흐릿한 내 첫사랑은 당시 누나의 절친이었다. 나를 초등학생 때부터 봐오던 그녀는 내가 대학에 가면 남자 친구 삼겠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더니 정말로 내가 수능을 끝내자마자 나를 남자 친구로 임명하였다. 홀리듯 연애를 시작한 난 그녀의 남자 친구 역할에 점차 익숙해져 갔고 프로페셔널한 그녀의 리드에 따라 연애의 여러 첫 경험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연애의 달콤함에 빠져있던 와중에도  하나 내가 힘든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심각한 장난기였다. 친구 동생으로 봐온 시간이 길어서인지, 그녀는 나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고 당황해 어쩔  몰라하는  모습을 즐겼다. 귀신 분장으로 자취방에 몰래 숨어 들어와  놀라게 하거나  학교 가방에 자신의 속옷을 넣어두는 것은 장난 축에도 끼지 못했다.


조별 발표 전날 발표 파워포인트 파일명을 삼류 야동 제목으로 바꿔놓는 장난 덕에   학년 내내 과에서 “왕가슴 성애 변태라고 불리었다. 용돈이라며  지갑에 넣어준  원짜리 지폐들에 세종대왕 대신 그녀의 얼굴이 포토샵으로 합성되어 있던 것을 호프집 사장님이  목덜미를 붙잡을 때야 알아차렸고 그날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냈다.  그때마다 그녀에게 화를 냈고 그녀는 지구의 모든 기를 모은 애교로 사과했지만, 좀처럼  장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은 안전한 날이라며 콘돔 없이  끌어안은 다음날 아침에는 “… 아니던가?”라고 중얼거려서  소름 돋게 하기도 했다.


“넌 너무 순진해서 내가 이렇게 훈련을 시켜줘야 해. 안 그럼 너 딱 사기당하기 좋은 성격이야”


그러던 그녀의 마지막 장난은 내가 군대에 있을  면회하러 온 날이었다. 펑퍼짐한 원피스 배안에 바가지를  넣고서 면회장 구석에서 훌쩍거리던 그녀 덕분에  애인을 임신시키고서 군대로 도망가버린 천하의 쓰레기로 불리게 되었다. 그날  그녀에게 진심으로 화를 냈고 이후  달간 연락이 없던 그녀는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간다며 이별의 편지를 보내고서 인연을 끊어버렸다. 이후 친누나도 비슷한 시기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분명 그녀와 교류가 있었겠지만,  그녀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나도 이후 정신없는 군생활을 하고 복학을 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면서 그녀는  추억 속의 첫사랑으로 남게 되었다. 그녀와의 첫사랑이 이어졌다면 그리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아마 지금쯤 맞은편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깔깔대는 학생 같은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조카 연이의 학원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되자 누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다, 십오 년간 묻지 않았던 그녀의 안부를 처음 물었다.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누나는 한참을 침묵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너 갑자기 그걸 왜 물어? 연이가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한 거야?”


평소답지 않은 누나의 당황하는 목소리에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매형과 결혼하고 수년간 애가 생기지 않던 누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자마자 연이를 낳았다고 했다. 작년에 처음 만난 열다섯 살의 연이는 신기하게도 나를 많이 닮았있었다. 나와 연이를  사람들은 연이의 아빠가 매형이 아니라 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갑자기 지난 십오 년간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아침드라마 극본 같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부들거리는 손에 간신히 힘을 쥐며 핸드폰을 입에 갖다 대었다.


문득 십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장난을 치던 모든 순간들이 영화의 장면처럼 떠올랐다. 부대 면회실에서 당황해 어쩔  몰라하는 나에게 그녀는 “뻥이야!”를 외치며 눈가의 가짜 눈물을 훔쳤었다. 부대 근처 시장에서 샀다는 바가지를 그녀는 면회를 마친 마지막 순간까지 옷에서 꺼내지 않은  배에 품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상 그녀와의 연애가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었다.


“… 누나, 혹시… 혹시… 연이가 그 사람 딸이야?”


수화기 너머 누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누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의 불안한 짐작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늘게 떨리던 누나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그 소리가 갑자기 큰 웃음소리가 되었다.


우하하하!  진짜 속는구나. 이야, 어쩜 걔는 네가 속을걸 어떻게 알았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황망해하는 나에게 누나는 그녀가 십오   계획한 장난들려주었다. 캐나다 병원에서 연이가 태어나자마자 축하하러 찾아온 그녀는  닮은 연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누나에게 장난을 제안했다고 한다. 순진내가 언젠가는  번쯤 연이 출생의 비밀에 대해 의심할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날이 오면 누나는 최대한 당황한  연기를 하고 내가 연이의 아빠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그녀가 부대 면회장에서 쳤던 마지막 장난이랑 연결하면  분명 속아 넘어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꺼이꺼이 웃느라 숨도  쉬던 누나는 그녀가 십오   남긴 메시지라며 나에게 말을 전했다.


“거봐, 넌 순진해서 또 당할 거라 했잖아. 이렇게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가끔 내 생각하면서 세상을 좀 영악하게 살아.”


 믿겠으면 유전자 검사 결과도 떼어줄  있다며 큭큭대는 누나의 말을 들으며 전화를 끊고 나니 롤러코스터라도 타고난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십오  만에 당한 그녀의 매콤한 장난에 어이가 없어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아니 장난을 쳐도 어떻게 이런 장난을


“삼촌, 왜 그래? 울어?”


학원을 마친 조카 연이가 어느새 다가와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연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그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연이의 머리에 꿀밤을 매콤하게 연달아 먹였다. 콩! 콩! 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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