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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우 Sep 10. 2022

사내연애 자진신고 기간

K-사내연애의 매운맛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안내데스크 직원은  남자가 다가오자 들고 있던 수화기를 떨어뜨릴 만큼 깜짝 놀랐다. 그가  것이라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날카롭고 위압적인 그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미식축구 선수 같은 넓은 어깨와 가슴을 덮은 짙은 감색 슈트에는 잔주름 하나 없었고, 뒤로 넘겨 빗은 금발 머리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다듬은 것처럼 날카롭게 정돈되어 있었다. 안내데스크 직원의 전화에 나와 마주한 그의 모습은 아이비리그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전형적인 미국 기업법무팀 변호사의 모습이었다.  그의 굵은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서 앞으로 한 달간 그가 일으킬 사무실의 풍파가 걱정되었다.


미국 본사 법무팀 소속의 변호사인 그가 한국의 사무실에 찾아오게 된 것은 지난달 본사에서 발표한 새로운 업무규정 때문이었다. 매달 이메일로 날아오는 본사의 업무 규정은 놀라울 것이 없었다. 회사 컴퓨터로 음란사이트에 접속해서는 안된다던가 회사 비품을 사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었어서 평소 관심을 두는 직원들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달 날아온 업무 규정은 제목부터 직원들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사내연애 자진신고 기간


회사 내에서 로맨틱한 관계를 갖고 있는 직원들은 앞으로 한 달 안에 인사부에 자진 신고해야 함. 특히 업무성과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 예를 들어 상사와 부하직원 간에 로맨틱한 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앞으로 각 지역 사무소로 파견될 본사 법무팀 변호사와 인터뷰를 진행해야 함.”


얼마 전 미국 본사에서 고위 임원과 그 부하직원 간의 부적절한 관계가 미디어에 보도되면서 난리가 났었는데 그 때문인 것 같았다. 그 고위 임원은 애인인 자신의 부하직원에게 인사상의 이익을 몰아주고 연봉도 파격적으로 올려주었다가, 이를 문제 삼은 다른 직원의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사무실은 이 새로운 규정에 어수선해졌다. 사적인 관계를 왜 회사에 보고해야 하냐는 반발도 있었지만, 이어지는 회사의 강경한 이메일에 반발은 잦아들었다. 사내에서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관계를 맺고 있는 커플들은 자진신고기간에 신고를 할지 말지 고민하였고, 본사 범무팀 변호사와 어떤 인터뷰를 하게 될 것인지 불안해했다.


“본부장님, 이게 무슨 일이래요? 나 이 회사 다니면서 이런 통역업무는 처음이에요.”


파견 변호사의 통역 업무를 담당하게 된 김비서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식민지를 점령한 장군처럼 가장 큰 회의실을 차지하고서 가져온 노트북과 녹음기 그리고 두툼한 검을 수첩을 펼쳐놓고 업무를 시작했다. 김비서는 그의 옆에서 자진 신고하는 사내커플들의 인터뷰를 통역하고 그가 랜덤으로 추출한 사내 메신저의 대화 내용을 번역하는 업무를 하게 되었다. 난 걱정 말고 그의 업무지시에만 잘 따르라고 김비서를 다독였지만 한동안 어수선할 사무실이 걱정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부터 커플들이 커튼이 내려진 그의 방으로 호출되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대로 사무실은 어수선함을 넘어 충격의 혼돈에 빠져들었다. 잘 알려진 공개커플들은 물론이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커플들이 방으로 불려 들어가는 모습에 사무실은 발칵 뒤집혔다. 평소에 그렇게 으르렁대며 싸우던 영업팀 김 과장과 마케팅팀 이대리가 방으로 불려 들어가자 직원들은 세상 믿을 사람 없다며 경악했다. 평소에 흠모하던 주 과장이 신입 인턴과 그 방에 불려 갔다는 소문이 돌자 비서실 최지연 대리는 원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되어 사무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소식은 노처녀 히스테리 끝판왕 신지애 부장이 같은 부서에  살이나 어린 김진호 대리를 따라  방에 수줍게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소식은 사무실 업무를 마비시킬 만큼의 충격파를 일으켰다. 성공에 눈먼 김대리가 승진을 위해  부장에게 들이댔다는 썰부터  부장이 그동안 모아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썰까지, 사내에는 이미  방에 다녀온 사내커플들의 리스트와 사연들이 찌라시처럼 돌고 있었다.   풍파를 잠재우기 위해 인터뷰가 진행되는  주변으로 출입금지 구역을 설정하였다.


“Mr. Lee, can we have a talk for some minutes?”


사무실이 충격에 빠진 지 삼일째 되던 날 오후, 법무팀 변호사가 내 방으로 불쑥 찾아왔다. 뜬금없는 그의 방문보다 내가 더 놀란 건 수척해진 그의 모습이었다. 푸르스름할 만큼 말끔하던 그의 턱에는 다듬지 못한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고 눈 아래는 판다 못지않은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와 있었다. 소파에 엉덩이를 대자마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궁금한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What the hell is 썸? (도대체 이 망할 썸이라는 게 뭐예요?)”


처음 그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오백 명 정도의 직원들이 일하는 한국 사무소에서 그는 많아야 다섯 커플 정도를 예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예상을 훨씬 넘는 마흔 커플들이 지난 삼일 동안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무슨 대학교 기숙사도 아니고 왜 이렇게 많은 커플들이 신성한 일터에 존재하는지부터 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더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중에 상당수는 자신들이 아직 로맨틱한 관계는 아니고 썸의 단계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썸이라는 생소한 관계에 대해 그는 구글과 위키피디아를 뒤져가며 공부했지만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 내용과 사내 메신저 기록을 밤새 뒤져가며 썸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관계에 대해 정의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서로 호감을 가지고 가까워지는 관계’라고 구글에 나온 데로 쉽게 정의했지만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이 정의는 수많은 변종 사례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한다. 가끔 메신저로 서로의 상사를 욕하고 커피 한두 잔 마신 남녀는 자신들이 썸을 한참 지나 로맨틱한 관계라고 주장하는 반면, 회식 마치고 집에 바래다주다 몸을 섞은 남녀는 오히려 본인들이 썸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고 한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인터뷰 도중 한쪽은 썸이라고 하고 반대쪽은 직장동료관계라고 하고, 한쪽은 썸이라고 하고 반대쪽은 사귀는 관계라고 하는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경우였다고 했다.  그러다가 서로 싸우고 회의실을 뛰쳐나가는 상황을 몇 번 겪고 나서는 그는이 썸의 던전 같은 곳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앞에서 인터뷰 녹취록을 뒤적거리던 그는 얼굴을 감싸며 고통스러워했다. 회사의 모든 일을 규칙과 규정으로 반듯하게 정의하는데 익숙했던 그는 실타래 같이 얽히고설킨 문제 앞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는 들고 온 서류뭉치 중에서 종이 한 장을 보여주며 이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며 나에게 물었다. 그 문서에는 노처녀 신 부장과 열 살 어린 김대리의 관계에 대한 본인들의 자백과 동료 직원들의 증언이 적혀 있었다. 그 커플은 순순히 관계를 인정했다. 신 부장은 김대리의 태만한 업무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최고의 인사평가를 주었고 근태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봐주었던 증거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동료 직원들의 증언이었다. 동료 직원들은 신 부장이 김대리를 편애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으며 신 부장에 대한 징계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이런 부당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김대리는 그만한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 Here, they said Mr. Kim is 논개. What is 논개? (다들 김대리가 논개라고 말했어요. 논개가 뭐예요?)”


 단번에  이유를 이해할  있었다. 월드클래스 짜증으로 유명한  부장은 최근에 마치 딴사람이  것처럼 부드러워졌다. 하루에  번이고 히스테리 섞인 짜증으로 부서 직원들을 공포로 몰아넣던 그녀가 너그러워지자 그녀의 부서에는 따뜻한 봄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직원들 말대로  평화는 김대리 덕이었다. 김대리의 희생 덕분에 동료 직원들은 평화를 누릴  있었을 테지. 하지만   상황을 그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그는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고 그날도 커플 넘게  방을 다녀갔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그가 차지하던 회의실은 비어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업무가 예정보다 빨리 끝났다는 메일 한통을 보내고 그날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첨부된 보고서에는 그가 했던 수많은 인터뷰와 조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무소에서는 문제가 될만한 로맨틱한 관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담겨 있었다.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겠지…’


도망치듯 떠나버린 그의 빈자리에는 수많은 서류들과 빈 커피잔들이 쌓여 있었다. 그의 통역을 돕던 김비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회의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난 그녀 손에 들인 서류뭉치를 빼앗아 들며 말했다.


“뭐하러 자기가 혼자 다 정리하고 있어. 나한테 맡기면 되지.”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당분간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며. 오빠는 나한테 아주 눈길 한번 안주더라. 섭섭했어.”


K-사내연애의 매운맛에 데어 도망쳐버린 그 덕분에 다시 사무실에는 평화가 돌아왔다. 오늘도 사무실은 사랑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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