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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우 Aug 11. 2022

오늘 밤 우리가 같이 잘 운명일까요?

테이블 위에는 카드키 네 개가 올려져 있었다. 호텔에 체크인하면서 받은  방키  개와 그녀의 방키 두 개였다.  방 번호가 적혀 있지 않아 네 개의 카드키는 모두 똑같아 보였다.  중에 두 개는 301, 나머지 두 개는 302 키일 것이다. 


그럼 각자 하나씩 골라서 문이 열리는 방으로 들어가자는 거죠?”


“맞아요. 각자 다른 방에서 잘 수도 있고 우리가 같은 방에서 잘 수도 있죠. 운명에 맡기는 거예요.”


그녀의 제안은 그녀와 저녁식사 동안 함께 마신 와인 두병의 취기를 싹 잊게 할 만큼 솔깃했다. 그녀는 와인잔을 다시 입에 가져가며 내 반응을 살폈다. 갑작스럽지만 매력적인 제안에 난 가슴이 떨렸다.


지루한 지방 소도시로의 삼박 사일 동안의 출장. 그녀와 난 부서에서 딸린 식구가 없는 유일한 미혼이라는 이유로 명절 연휴가 낀 지방 출장에 차출되었다. 나흘 동안 할 일이라곤 매일 아침 고객사 건물에 가서 우리 회사가 설치한 서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것뿐. 이렇게 지루하고 외로운 곳에서 남녀가 단둘이 시간을 보낼 방법은 이렇게 호텔 바에서 술잔을 주고받는 것뿐이었다.


“이 부장님은 나랑 자게 될까 봐 싫으세요?”


그녀는 유달리 하얗고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테이블에 놓인 촛불이 와인잔에 반사되어 그녀의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검은 민소매 원피스 위로 쇄골에 깊은 그림자가 져서 그녀의 가녀린 목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와 난 좋은 직장동료의 관계로 지내왔다. 이번 고객사에 설치한 서버 프로젝트도 그녀와 나의 합이 잘 맞아 이뤄낸 성과이기도 하다. 쾌활하고 에너지 넘치는 그녀와 일하는 것은 나에게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직장동료 관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웠다. 난 이미 사내연애의 후폭풍을 한번 호되게 겪었고, 말 많은 회사에 비밀이라는 것은 없다.


난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옆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손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날카롭고 깊은 그녀의 눈매에 나른한듯한 눈동자가 나를 지긋히 바라보았다.


“…흐읍”


난 나도 모르게 숨을 낮게 들이마시며 그녀의 목선을 따라 시선을 천천히 내려보았다. 칼같이 단정한 그녀의 검은 원피스 아래 좁고 긴 허벅지가 테이블 아래로 길게 뻗어 있었다.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면 한 손에 다 잡힐 것 같은 종아리를 눈으로 어루만지다가 얇은 발목과 아찔하게 걸쳐있는 하얀 하이힐에 시선이 머물렀다. 간당간당 발끝에 걸쳐있던 하이힐이 바닥에 툭 떨어지자 내 이성의 끈도 툭 끊어졌다.


“먼저 올라갈게요”


남은 와인잔을 비우고 그녀 쪽에 가장 가까운 키를 하나 집어 들고 일어섰다. 그녀의 곧은 목선을 훔치며 그녀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번째 시도에 301호의 문은 덜컥 열리며 반듯하게 정리된 하얀 침대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마시며 쿵쾅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일회용 칫솔로 급하게 입안을 개우고  한가운데에 서서 옷매무새를 만졌다. 확률은 절반이다. 그녀가  방에 들어올 확률.


“또각또각”


그녀의 하얀 하이힐의 발자국 소리가  앞에 멈추었다.  뚫어져라 바라보며  감각을 집중시켰다.   정도의 긴장된 적막이 흘렀을까,   철컥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그녀의 곧은 다리가  안으로 뻗어 들어왔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천천히  앞에 다가왔다.


이것은 운명이었다. 우리는 운에 오늘 밤을 맡겼고  결과대로 그녀가  앞에서   손가락으로  셔츠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이건 운명인 거죠?”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원피스 지퍼를 천천히 내리며 물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한테는 운명이죠. 나한테는 선택이고.”


그녀의 손에 남은  개의 키가 모두 들려있었다. 그녀의 선택 앞에  그대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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