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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우 Aug 20. 2022

어디선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그녀의 노예쿠폰

난 장난인 줄 알았다. 지해가 내 생일파티를 준비했으니 꼭 오라고 했을 때, 난 당연히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우리 과에서 가장 인기 많은 퀸카였고 난 존재감이 전혀 없는 아웃사이더였으니까. 그녀의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약속 장소에 뛰어들어 갔을 때에는 절망스러운 표정의 그녀와 몇 명의 화난 동기들 그리고 녹아 으스러진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마주하게 되었다. 실망한 그녀를 달래기 위해 난 그녀의 요구대로 소원쿠폰에 서명을 해야 했다. 구깃한 호프집 쿠폰 뒷면에 그녀는 동그란 글씨체로 또박또박 소원을 써 나갔다.


“노예 쿠폰.


지해가 호출하면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한 시간 안에 찾아와야 한다.


이 쿠폰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 없음”


그렇게 세장의 노예 쿠폰에 내가 서명을 하고 나서야 그녀의 얼굴은 밝아졌고 난 반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케이크의 촛불을 불었다.



첫 번째 쿠폰이 사용된 건 그로부터 일 년 후였다. 지해는 군대 간 남자 친구를 면회하러 갔다가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면회가 불발되자 나를 강원도 춘천으로 불러냈다. 집에 멍하니 누워있던 난 동서울터미널에서 가장 빠른 고속버스를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지해는 춘천터미널에서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내가 늦었다며 투덜거렸다. 그녀가 남자 친구와 추억을 만들려 예약했던 펜션에서 난 그녀를 위해 고기도 굽고 연애상담도 해주고 술주정도 받아주느라 밤을 홀딱 새웠다.


두 번째 쿠폰이 사용된 건 그로부터 오 년 후, 지해가 선을 보러 나갔다가 십 분 만에 차인 고급 호텔이었다. 양복을 꼭 입고 출동하라는 그녀의 호출에 난 취업 면접에나 입던 셔츠를 다려 입고 총알택시를 타고 호텔로 달려갔다. 교양 있는 여자인척 겨자색 명품 원피스를 단정하고 차려입은 그녀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가 그녀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예약되어있던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에 끌려갔다. 분에 넘치는 코스 요리와 와인을 즐기며 난 밤늦게까지 그녀의 직장 스트레스와 연애 고충을 들어주었다.


잔뜩 취한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가려다 헛헛한 마음에 그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었다. 소파에 기대어 찬물을 들이켜는 그녀 옆에 앉아 갑갑했던 넥타이를 풀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장의 쿠폰을 그녀가 언제 쓸것인지 궁금했다.   무릎을 배게 삼아 소파에 드러누운 그녀에게 물어봤다.


“글쎄… 그건 또 너한테 달렸지.”


‘나한테 달렸다고?’


그녀의 대답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두 번의 쿠폰은 다 그녀가 필요할 때 날 불러냈던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나한테 달렸다는 건지. 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어이없는 표정에 그녀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세게 찌르며 투덜댔다.


“바보… 나 필요할 때 널 불러낸 적 없어. 다 네가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을 때 불러낸 거지.”


그녀의 말에 옛날 기억들이 아득하니 떠올랐다. 유일한 가족이었단 엄마의 첫 번째 기일날. 아침부터 혼자 제사상을 차리기 위해 허둥대다 슬픔과 그리움에 온몸이 눌려 컴컴한 방에 혼자 누워 일어나지 못하던 그때, 그녀의 전화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춘천의 맑은 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을 보았을 때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슬픔이 걷어졌다. 밤새 조잘대던 그녀 목소리를 들으며 난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연달아 취업에 실패하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공채에서의 탈락을 확인했던 오늘, 그녀는 날 다시 일으켜 세워 양복을 입혀 호텔로 불러내었다. 백수로서 꿈도 꾸지 못할 럭셔리한 고급 호텔에서 와인과 음식을 먹으며 난 그동안의 패배감에서 벗어나 잠시 동안의 호사를 누렸다. 매력적인 그녀와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즐기는 나를 아무도 백수로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네… 넌 항상 내가 널 필요할 때 불러냈구나.”


그녀가 내 무릎 위에서 입술을 삐죽이며 날 올려다보았다. 습기 찬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마지막 남은 그 쿠폰을 그녀가 오늘 바로 지금 써줬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내일 밤까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난 지금 그녀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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