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서
-내면의 거울, 외부의 벽
조지나와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찾고 있었다. 조지나와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대와 배경은 달라도, 둘 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착각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바로 돈이다. 돈을 손에 넣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고, 그들 각자는 불완전한 세계에서 완전한 삶을 찾으려는 꿈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꿈은 결국, 한 인간의 절망적 필연성으로 이어진다.
조지나는 비좁은 자동차에서 살아간다. 맥도날드 화장실에서 씻고,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는 생존의 테두리 속에서 그녀는 범죄를 결심한다. 그녀가 느끼는 극단적인 상황은 어떤 종류의 ‘해방’을 갈망하게 만든다. 그 해방은 단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곳’을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서의 재탄생을 꿈꾸는 것이다. 그곳이 무엇이든, 지금의 자신을 벗어날 수 있는 어떤 방식이라면 범죄도 그들의 선택이 된다. “이 똥차 대신 진짜 집에서 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이 한 마디 속에는 조지나의 절박함과 그녀의 본능적인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녀의 계획은 단순하다: 500달러만 있으면, 자유와 미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 그녀는 손쉽게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범죄 후의 고독과 죄책감은 그 단순함을 철저히 깨버린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조지나와 다르게, 범죄의 정당성을 철학적으로 만들어낸다. 그는 ‘선한 목적’을 위해 악을 저지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오직 돈을 가졌다는 것뿐, 그밖에 인간으로서 아무런 값어치가 없고 전혀 무익한 존재인 노파가 있어.” 라는 생각 속에서 그는, ‘노파의 죽음’이야말로 인류의 진보를 위한 희생이라고 주장한다. 이 내러티브는, 마치 소설 <1984>에서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삶을 규명하는 방식처럼, 자신의 부재가 더 큰 선을 위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은 불가피하다는 관념에 묶여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정의에 따라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 결과로 다가오는 무력감과 불안은 그가 믿었던 ‘선’을 무너뜨린다.
범죄를 저지른 동기, 그들은 각기 다르게 이해했지만, 결국 사회적 벽과 심리적 한계 속에서 서로 같은 함정에 빠진다. 그 벽은 돈이든, 권력이든, 아니면 사회가 부여한 ‘정당함’의 기준이든 간에 인간의 본능적 탈출 욕구를 강하게 자극한다. 그들은 모두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외부의 잣대에 맞추어 자신을 밀어 넣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범죄의 결과보다는, 그 범죄를 선택하게 만든 심리적 원인이다.
그들의 범죄 동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포인트는, 사회적 억압에 의해 만든 무의식적인 의식들이 그들의 선택을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마치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에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일상에 갇혀 괴로워하는 것처럼, 범죄는 그것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기에 선택된다. 그들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자기만의 정의와 자기만의 해석을 통해 세상을 변혁하려는 시도였다.
범죄는 그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바로, 세상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범죄가 실패한 후, 그들은 결국 자신의 욕망이 이끌었던 결과를 직면하게 된다. 조지나는 결국 자신의 죄책감에 휘말리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독에 이르게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의 내면에서 어쩌면 그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 두 인물이 범죄를 통해 깨달은 것, 그것은 바로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결국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단순하지만 비극적인 진리였다.마이클 잭슨의 ‘Bad’가 단순한 반항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며 받아들이는 고백인 것처럼, 그들도 범죄를 통해 결국 자신의 본성과 마주하게 된다. 자아의 붕괴와 사회적 체제의 압박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그저 절망만이 남은 채, 그들의 범죄는 영원히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내면의 소리가 아닌, 사회적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목표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