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by 제이티

류호림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대중들에게 엄청난 희망과 감동을 안겼고, 하지만 이 말은 그저 말일 뿐이었다.

권력의 불꽃은 엄청났다, 사그라들 줄을 몰랐으며 성화봉 위의 솟구치는 붉고 때로는 푸른 빛은 여러 세력들의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불꽃의 성화봉을 손에 쥔 순간 백성과 신하들은 자신의 눈앞에 이마를 박고 절을 하며, 누구든 자신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승리를 뜻하는 그 불꽃의 성화봉을 차지하고 있는 이를 ‘왕’이라 부르며, 왕은 이 불꽃을 불안해하면서도, 초조해하면서도, 무엇보다 소중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결코 뺏기지 않겠다고 어루만진다. 하지만 역사상 이 권력의 불길의 주인은 바뀌고, 또 바뀌었다. 아름답고, 고귀하고, 탐욕스러운 그 불꽃에 홀려, 이 불꽃을 꼭 차지하리라 많은 이들은 그들의 은색 빛 날카로운 검을 붉은 물에 적셨다.

권력의 불꽃에 비친 왕의 눈동자가 어떻게 일렁이는지, 그 권력의 불꽃을 어떤 방식으로 빛나는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분명 나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영광의 불꽃을 차지하고 왕좌에 오르면 망해가는 나라를 다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그 왕좌에 올라 나라를 이끌어가는 과정도 권력의 성화봉을 잡은 과정만큼이나 쉽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을 붙잡은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왕좌와 권력의 불꽃을 노리는 신하들을 견제해야만 한다. 하지만 왕의 권력은 곧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의 수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큰 염려와 함께 품은 관심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신하들이 순순히 왕을 지지하는 충신들이 되어주겠는가, 아니다. 신하들이 왕의 충신이 되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왕은 신하들의 말에 더 귀기울이게 되고, 몇몇 신하는 이러한 왕의 불안을 이용해 왕과 충신 사이를 어지럽히고, 이간질 시킨다. 대표적으로 공신왕과 신돈의 예시가 있다. 고려는 무신 집권기부터 7차에 걸친 원나라의 침입을 받고난 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혼잡한 이 상황에서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취한 후 개혁을 추진할 인물을 찾던 중 신돈을 만나며, 그를 존경하고 스승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그들은 끈끈한 관계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후, 신돈은 친원파 권문세족들을 숙청하고, 신진 대사부 양성을 위한 성균관을 강화하여 권세가들이 빼앗은 백성들의 땅을 돌려주고, 노비가 된 양민들을 해방시켜주는 민생 안정과 인적 쇄신이라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때문에 독이 오른 권문세족들은 신돈이 왕좌를 노리고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결국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하고 그를 따르는 지지자 집단을 뭉개버린다. 신돈의 정책은 정의로운 것이었지만, 왕의 입김이 없다면 처참히 무너져내릴 모래성과 같았고, 공민왕의 입장에서 그의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를 넘볼 기미가 보이는 세력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의 반원 정책이라는 혁신적이고 최초의 용기와, 안정된 백성들의 생활을 위한 정의는 또다른 신하들의 욕심과 분노에 가라앉게 되었다.

결국 한 국가가 망하고 흥하는 과정은 행운과, 능력과, 시대의 흐름, 이 세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왕좌에 앉아있는 왕의 입장에서도 왕을 돕는 충신의 입장에서도 나머지 신하들의 입장에서도 그들의 뜻이 정의롭건, 용기있건, 악랄하건 그 시대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알 수 없는 길로 흘러간다. 상호보안이면서도 상호견제인 신하와 왕의 관계,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고 서로가 없으면 아무 업적도 세울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에서 왕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었을까? <삼국지>에서는 비교적 특별한 능력이 없는 유비에게 관우, 장비, 제갈량이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충신 역할을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어떻게 관우, 장비, 제갈량은 유비를 끝까지 섬기고 자신들의 위험이나 이익 앞에서도 오직 그에게만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그의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 개의 국가로 나눠지기 전, 황제의 힘이 약화되고 있었다. 이때 조조는 이런 약한 점을 틈타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유비는 같은 핏줄을 나누고 있어서도 있지만 그는 왕을 배신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러한 그의 의리와 충성심, 그가 사람 대 사람에서 소중히 지켜낸 관계가 다른 이들에게 와닿았던 것은 아닐까. 아, 저 사람은 나를 배신하지 않겠구나 하는 믿음이 끈끈하고 깊은 충신과 왕의 관계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어, 엄마가 TV를 보면서 나에게 공부를 하라고 하면, 나는 공부를 하기 싫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자신도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라는 언행일치를 보여준다면, 나는 순순히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할 것이다. 왕과 신하의 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신하가 왕을 바라볼 때, 그 왕의 행동 하나하나는 신하가 왕을 따르거나 배신할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가지의 행동이 더 중요한 것처럼, 왕은 신하에게 신뢰할 수 있는, 믿음직하게 따를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한다.

“그분의 행위와 삶을 그분의 가르침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분의 손짓 하나하나가 그분의 의견보다도 더 중요하다네. 나는 그분의 설법, 그 분의 사상에서 그분의 위대함을 깨닫는 게 아니라, 오직 행위와 삶 속에서 그분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네”

-싯다르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두의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