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사랑하라! 다른 사람의 인정과 관심에 기대어 살다 보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형처럼 살아가게 된다. 누구나 아는 얘기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뻔한 자기 계발서의 한 줄기 문장 같은 말이 아닌가? 내 진짜 모습은 무엇이고 또 가짜는 무엇일까? 그것도 또 하나의 내가 아닐까? 호감 가는 사람이나 처음 본 사람에게 그 누구가 맨얼굴에 머리 삐쭉한 몰골 그대로를 보여주기 원할까? 소개팅 자리에 나가거나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 평소보다 더 꼼꼼히 씻고 집에 있는 옷 중에 가장 비싼 옷을 골라 입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닌가? 말끔한 내 모습과 집에서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 중에 어느 것이 진짜 나라고 물어본다면 곤란하다.
왜냐 둘 다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관심과 호응을 얻기 위해 눈치를 보고 칭찬받을 행동을 하다가, 점차 성장해 나감에 따라 주위 또래 친구들과 선생님의 기대와 눈치를 보며 자신이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해야 할지 깨닫는다. 집에서처럼 떼쓰고, 징징대는 아이를 반 친구들이 엄마처럼 대해 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학교는 이해관계와 돈이 스며들지 않아서 그나마 인간적이다. 처음 알바를 시작했을 때 사장님이 처음 했던 소리가 "학생 여기는 학교가 아니다." 하는 것을 보면 사회는 더 치열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곳이어야 하고, 책임을 더 강요하는 곳임에 틀림없다. 자연스럽게 '나'의 역할을 변화하고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회사 동료를 학창 시절 죽마고우처럼 편하게 대할 수 없는 것도, 나이 어린 군대 선임을 아는 동생처럼 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멜레온에게 너의 진짜 색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뭐라고 답할까?
"진짜 나의 색이라?"
한참을 멍하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진짜 가짜) 단어의 앞의 한 글자가 이렇게나 큰 차이일지 놀라울 따름이다. 나에게 진짜 너의 있는 모습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만나는 사람마다 관계의 역할이 달라지는데,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일 수도, 진지한 형일 수도 아니면 무심한 아들일 수도 있겠다. 무 자르듯이 딱 잘라 나를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의 카톡 프사와 인스타 피드는 어쩌면 자신의 모습 중 가장 행복한 모습을 찍어 올릴 수 도 있겠다. 내 속의 수많은 내 모습 중에 굳이 지질하고 불편한 것을 올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는 우울하고 슬픔의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꿋꿋하고 희망적이고 쿨하고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은가? 내 인생도 슬픈데 남의 가슴속에 있는 슬픔을 퍼올릴 필요가 없다.
결정적으로 슬픔은 소비로 이어지지 않는다. 카톡 페이스북 인스타 유튜브는 기업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의 수익원은 다름 아닌 광고다. 유쾌한 웃음과 잘 차려진 옷과 맛있는 음식은 결코 내 인생에 몇 번 없는 순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것일까? 아니면 잘난 피드 속 모습이 내 모습일까? 아니면 내가 바라는 모습일까? 혹은 광고주가 바라는 모습일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일까?
웃음소리가 큰 아이는 혼자 있을 때 그 누구보다 적막한 공기를 마셨을 확률이 크다. 나를 표현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더 감추고 편집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원하고 그 안에서 나를 찾는 행위다. 누구나 어느 시대나 나를 더 과장하고 잘 보이려 하는 욕구는 있으나 지금처럼 매 순간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프로필 사진이 현실의 내가 아니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게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는다. 그러면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은 일 년에 3번 보는 친구일까? 명절 때 보는 부모님일까? 매 순간 연결되어 있고 글을 쓰자마자 바로 반응해주는 사람들일까?
그렇다고 현실세계에서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평생살아도 사람속은 모른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