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와 영주, 최은영
Q: 언제, 어디서 만났나요?
A: 워낙 지루함을 잘 느끼고 한 자리에서 뭔가를 진득하게 못 하는 터라, 한 권으로 된 장편소설을 완독 하지 못해서 구매 후 서재에 방치해두는 습관이 있다. 이 책은 단편 소설들이 여러 가지 수록된 모음집이라,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 읽으면 돼서 부담 없이 페이지를 술술 넘기면서 볼 수 있었다. 도서 속 <한지와 영주>를 만난 건 작년 6월, 종강 이후 동기들과 올라탄 경주행 고속버스 안에서였다.
Q: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짝사랑을 할 때, 또는 이별을 했을 때 즐겨 듣던 음악이 기억이 그 자체가 되어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그 노래를 다시 꺼내 들으면 그 당시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처럼, 내게는 이 소설이 그랬다. 사람은 몇 개의 다리를 건넌다는데, 나는 그 당시에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과의 이별로 크게 상심한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던 것은 가장 가까웠고 가장 의지했으며,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단절했던 일이었다.
등장인물인 영주가 어느 날 갑자기 가깝게 지내던 한지로부터 모른 채를 당하기 시작했고, 끝내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한 채 이별을 했는데, 그들의 상황이 그 당시 책을 읽던 나의 상황과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극도의 이입을 하며 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울면서 읽은 기억이 있다.
단절되어 남겨진 사람은 수없이 생각하게 된다. 지난날 저지른 행동에 대한 반성과 후회, 자책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던 내게 이 소설은 마치 신이 그 당시의 나를 보고 써준 글 같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지와 영주>를 재정 독하면 그때의 감정이 상기되어 가슴이 무겁고 답답하다.
"네가 나에게 아무리 못되게 해도 난 상관 안 해. 세상 어디에도 널 미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이런 식으로라도 좋으니 너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고 싶어. 일주일 뒤에 너를 여기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걷다가도 눈물이 나. 이제 더 이상 너에게 이렇게 말을 할 수는 없겠지. 한지,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지지 마."
"한지, 더 이상 너를 방해하지 않을게. 나이로비에서도 잘 지내. 넌 지난 일들을 잘 잊는다고 했으니 좋은 기억만 남기고 다 잊어. 아니, 좋은 기억도 잊어. 한지 네가 건강하길. 너의 가족도, 레아도."
영주는 침묵 주간을 신청했고, 그녀는 한지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분명 자신에게 있을 거라는 불건강한 생각에 이르렀다. 침묵은 영주의 헐벗은 마음을 정직하게 보게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깊이 결합하여 분리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잊히고 싶은 마음,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 온전히 이해받으면서도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아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도 한지를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을.
결국 한지는 고향인 나이로비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 침묵으로 끝나버린 영주와 한지의 관계는 끔찍했다. 나와 그 사람의 관계도 그랬다. 관계가 이런 식으로 끝나버린 건 미화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기 합리화라도 해야, 꾸역꾸역 미화라도 해야 내가 살아가면서 불쑥 그 애를 떠올릴 때 미움, 고통보단 기쁨과 뭉클함이 먼저 올라왔으면 했다. 나는 그 뒤로 그 기억들을 필사적으로 미화했다. 그 애에게 사과하고 싶은 것들을 되뇌면서. 서로를 할퀴었던 아픔들, 그 애를 탓했던 날들. 그 애를 내 틀에만 맞추려고 했던 지난날의 나. 나는 네게 진심으로 미안했다고,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함께 커온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내 가슴 한 켠에는 늘 네가 있으며 네가 어떻게 변하든 이 세상 어디에 있든 언제까지나 넌 내 좋은 친구라고.
Q: 간단한 추천사를 부탁드려요.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 <한지와 영주 中>
A: 모든 건 영원하지 않고 흘러간다. 그들뿐이 아닌 나도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곳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미천하고 나약한 우리는 알 수 없다. 지금 나와 닿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주고, 그것들이 흘러간다면 축복해주고 겸허히 받아들이면 된다. 누구에게나 이별의 경험이 있다. 그 이별을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들,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다 읽고 책장을 덮게 되면, 아마 당신도 당신만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