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기차의 안내 방송이 국경을 넘자마자 영어에서 프랑스어로 전환된다. 모든 객실에 울려 퍼지는 부드러운 음성이 파리로 온 모든 이들을 환영하는 듯하다. 두근거린다. 드디어 파리에 와 보는구나.
나와 프랑스의 관계는 이러하다.
어느 순간부터 자꾸 눈이 마주쳐 인사를 나누는 사이, 우연이 차곡히 쌓이다 보니 잦은 그리움으로 번진 존재.
사랑의 형태와 흡사하지만 일방적인 짝사랑에 조금 더 가깝다.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로 알려진 샤넬(Chanel)에서 일을 할 때도, 와인을 주력하는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글을 쓸 때도 그랬다. 많은 이들이 프랑스의 추억을 저마다 나눌 때 알게 모르게 자꾸 얽히는 느낌이 들면서 쓸쓸함이 감돌았다.
비로소 파리에 왔다. 만나고 보니 더 애틋하고 더 반갑다.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찍을 생각이 없었는데 아이들이 서로 찍어주겠다며 핸드폰을 요구했다. 안 찍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나.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난 강아지 구름이 문득 생각난다. 구름의 '생에 첫 한강’을 잊지 못한다. 처음 보는 광활한 잔디밭과 차가운 강바람과 햇살에 반한 구름은 한강에서 가장 환한 웃음을 보이며 행복한 산책을 했다. 나와 오빠는 그런 구름의 모습에 뿌듯해하며 구름의 사진을 마구 찍어댔고 구름의 모든 사진은 A컷으로 나왔다. 온 세상의 행복을 가진 강아지의 모습. 때 묻지 않은 미소가 담긴 사진을 보며 구름과의 한강 나들이를 생각한다. 구름이 한강은 나의 파리와 같은 느낌이었을까? 파리는 멀지만 한강은 집에서 너무나 가까운 곳이었는데. 이별을 하면 늘 잘해주지 못한 기억이 좋은 기억을 앞선다.
파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가 마주한 첫 계절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파리 예쁘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무의식 상태에서 내뱉었다. 오래된 건축물에서 오는 압도감이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현율과 같았다. 왜 유난히 프랑스 파리에 저마다의 낭만이 서려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작은 화분으로 발코니의 생기가 더해진 골목의 풍경, 갈색 베레모와 뿔테 안경, 얇은 머플러와 골덴 재킷에 투톤 앵클부츠를 신은 파리지앵의 패션, 어느 노인의 표정이 담긴 거리의 낙서에서조차도 예술적 영감들이 발현되고 있다. 센(Seine) 강의 흙색을 띠는 강물과 인도에 덩그러니 있던 정체 모를 배설물.. 조차도 모두 파리의 일부다. 극명한 대조만큼이나 매력적인 도시. 나는 파리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몽마르트르(Montmarte) 언덕에 올랐다. 하늘에 그려진 수평선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따스한 날에는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 나는 초록이 물결치는 계절에 다시 오고 싶다고 희망한다.
짧게 주어진 자유시간에는 별다른 고민 없이 깜봉(Cambon) 가에 있는 샤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르코 폴로 매장에 들러 좋아하는 티를 사고 산드로 매장에 가서 옷 구경도 했다. 몰랐는데 파리에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구글맵을 보며 깜봉 가에 들어섰고 대로변에 있는 수많은 명품 브랜드의 매장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제야 샤넬 매장의 정문이 보인다. 자그마한 모자 가게로 시작한 브랜드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사진으로만 보던 매장의 느낌과 실제로 좁은 골목에 들어와 매장 정문을 바라본 느낌은 사뭇 달랐다.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던 상상이 이제야 정확한 위치를 찾은 듯했다.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의 차이. 어른들이 젊을 때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샤넬 직원이 샤넬 귀걸이를 하는 것은 굉장히 흔한 일이다. 나는 같이 일하는 선배들이 저마다 다른 디자인의 샤넬 귀걸이를 하고 있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금속 알레르기가 있던 나는 엄마가 샤넬 귀걸이를 한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명품의 소비를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한 번의 소비를 통해 질 좋은 물건을 오래 쓸 수 있고,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에 강인함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모든 명품이 좋다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되게 비싼 값으로 치닫는 물건도 있다. 하지만 귀걸이 하나 정도는, 엄마에게 언젠가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사실 구경으로 끝내고 싶었지만 막상 부띠크에 들어서니 사사로운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엄마의 선물을 생각보다 일찍 사게 되었다. 선물하기로 마음먹은 지 어언 3년이 지났지만. 아름다움과 자신감을 상징하는 브랜드의 가치를 물건을 통해 잠시나마 빌리게 될 엄마를 생각하며 귀걸이를 골랐다. 나는 포장을 기다리면서 깜봉가 근처에 있는 마카롱 가게를 찾고 있었다. 프랑스에 와서 마카롱을 안 먹으면 너무 서운할 테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를 담당해 주던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 혹시 여기 마카롱 줄 수 있는 거 있어?"
"너 마카롱 먹고 싶어?"
"응.."
“알겠어. 마카롱 갖다 줄게. 조금만 기다려."
그의 영어는 투박한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뱉는 프랑스어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언어는 사람의 목소리도, 성향도 달라지게 하는 매력이 있으니까. 프랑스어에 무지한 나에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레몬 마카롱과 피스타치오 마카롱이 올려진 트레이를 가져다준다. 아마 vip 손님을 위한 마카롱이었을 텐데. 나는 포장을 기다리며 마카롱을 야금야금 음미한다. 부띠크에 머무른 지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나와의 시간에 최선을 다 해주어서 고마웠다. 그는 세일즈의 정석대로 나에게 다양한 제품군을 소개하며 가방을 착용해보게 했다. 일로서 매장에 가다가 손님으로 가니 나름 재미있었다. 나는 하얀 쇼핑백(전 세계 부띠크 중 깜봉가에 있는 샤넬에서만 하얀 쇼핑백을 쓴다)을 들고 파리의 색을 입는다. 기뻐할 엄마를 생각하며 이제 이 쇼핑백을 아무도 모르게 숙소에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하며(사실 귀걸이 외의 다른 물건도 있어서 쇼핑백이 컸다). 봉주르!!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벌건 대낮에 아침 인사를 흥얼거린다. 빈지노의 We are going to (2016) 노래가 배경 음악이 되고, 나는 파리를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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