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 안트워프
샤를드골 공항(Charles de Gaulle Airport)에서 빌린 렌터카는 3대. 우리는 각 차에 1, 2. 3호차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각 차의 운전자를 리더로 정했다. 운전을 맡은 사람은 마테오, 케빈, 양이다. 지난 영국 일정에서 여자 인솔자인 모아나도 합류했기에 뚜비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한 자리에 모였다.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오늘은 벨기에로 향하는 날. 우리는 숙소 로비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렌터카를 만났다. 조금 작고 네모진 느낌이 드는 아이보리색 벤 두 대와 스포츠카처럼 낮은 차체를 가진 회색 승용차 한 대. 1, 2, 3호차가 숙소 앞 좁은 도로에 비상등을 켜고 잠시 정차한다. 이제 우리는 차에 빠르게 도달해 20개 남짓하는 캐리어를 단시간에 트렁크에 쌓아야 된다. 한정된 공간에 모든 짐을 싣는 것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생각 없이 캐리어를 넣다간 트렁크에 빈틈이 생겨 마치 이가 빠진 어린아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트렁크는 순진무구하게 웃는다. 결국 모든 짐을 꺼내고 다시 처음부터 쌓아야 한다. 우리는 캐리어를 빠르게 차 앞까지 끌고 와 테트리스하듯 짐을 쌓는다. 짐을 싣는 게 처음이라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행동이 답답했는지 마테오가 운전석에서 내려 다가온다. 그의 진두지휘로 짐들이 어떻게 다 욱여넣어진다. 차 앞으로 서성이는 아이들의 시선 사이로 어느 차에 누구와 같이 타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모습이 보인다. 일단 자리를 임의로 배정하고 “당분간은 쭉 렌터카를 탈 것이니 자리는 천천히 정하자”는 말과 함께 출발한다.
출발 전 체크 리스트
-블루투스를 연결할 것
-무전기의 채널을 맞출 것
-젤리와 과자가 넉넉한 지 확인할 것
-두고 온 짐이 없는지 다시 떠올려 볼 것
우리는 각 차에 무전기를 두고 하나의 채널로 맞춘다. 어디를 가든 세 대의 차가 동시에 출발하겠지만, 실시간 위치와 심심한 잡담을 나누며 이동하기로 한다. 우리는 파리의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벨기에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한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무전이 온다. 2호차를 운전하는 케빈이다.
케빈: 2호차인데요. 차가 움직이지 않아요.
마테오: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니 무슨 말이야?
케빈은 혼란 속에서도 정말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케빈: … 차가 멈췄어요.
차가 갑자기 멈췄다니. 우리는 지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렌트한 지 몇 시간도 안된 차가 잘 가다가 멈출 수가 있나? 당황한 기색이 말과 행동으로 서슴없이 드러나는 마테오와 사람이 어떻게 침착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담담한 케빈의 태도가 극명하게 대조된다. 둘은 무전기 너머로 계기판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미 벨기에로 국경을 넘어온 상황이라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 톨게이트를 지나는 길목이 나오자 나머지 두 대는 급하게 갓길에 차를 정차했다. 마테오는 다급히 자취를 감췄다. 빠른 속력으로 톨게이트를 달려 나가는 수많은 차의 바람 소리가 유리창을 한참 때렸다. 그렇게 2시간가량이 지났다. 다행이라면 아이들은 누구 하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2호차의 안부를 기다려주었다.
몇 시간 사이에 급격히 녹아내린 듯한 마테오가 1호차에 돌아왔다. 상황을 들어보니 케빈(운전 고수라고 한다)의 유연한 대처로 2호차가 톨게이트 인근까지 어찌어찌 굴러와 안전한 곳에 차를 세울 수 있었고, 마테오가 문제의 원인이 기름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가장 가까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사 오는 데 30분 이상이 소요되었다. 위험 요소가 가득한 고속도로에서 다친 사람 하나 없이 상황이 마무리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차로 돌아온 마테오가 내뱉은 말이 나를 힘들게 했다.
“렌터카는 원래 기름이 가득 차 있지 않나?”
해외에서 운전이 처음인 케빈과 양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차와 비교했을 때 계기판도, 와이퍼를 작동시키는 버튼조차도 모두 다르니 출발 전 확인해야 할 기본적인 사항(백미러 위치, 사이드 미러 각도, 연료칸 등)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마테오는 캠핑카, 장기 여행 패키지 등 해외에서 렌터카를 다뤄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이 상황을 그저 가벼운 일이었다는 듯이 넘기는 그의 태도에 너무나 실망했다. 가볍게 흩날려질 말이더라도 '내가 더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와 같은 한 마디면 모든 게 이해될 것을.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결국 오늘 낮에 예정되어 있던 브뤼셀(Brussel, 벨기에의 수도) 워킹투어는 취소되었다. 다음날 또다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해서 아쉬운 마음이 컸다. 밤이 돼서야 안트워프(Antwerpen)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빌라처럼 생긴 한 아파트 앞에서 대기했다. 마테오는 숙소 주인이 알려준 대로 우편함 안에 손을 넣어 숨겨진 키를 찾았다. 우리 숙소는 2개의 호수로 나눠져 1층은 남자, 2층은 여자 숙소로 사용하기로 하고 서둘러 짐을 옮긴다. 우리가 그동안 다녔던 게스트 하우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집다운 숙소다. 널찍한 거실에 긴 소파와 TV, 요리를 하기에 충분한 주방과 긴 테이블, 아무것도 없지만 거실만큼 큰 테라스, 두 개의 방과 화장실까지. 목조 건물 특성상 휑한 느낌이 감돌았지만 모두의 지친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왜 좋은 숙소에서는 하루만 지내요?” 숙소와 사랑에 빠진 유진이 벌써부터 아쉽다는 듯이 말한다. 나는 한국에서 무겁게 들고 온 전기장판을 침대에 깔고 따뜻하고 포근한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