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트워프
어두컴컴한 하늘 사이로 투명한 새벽빛이 밝아 온다. 라디에이터 위는 손빨래한 양말과 수건이 축 늘어져 있다. 나는 화장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이른 시간에 일어난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집 화장실과 구조가 비슷하다. 욕조와 욕조 앞에 달린 샤워커튼과 세면대. 나는 당시 미국 화장실을 보고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샤워부스도 샤워기도 없는 샤워실에 심지어 세면대가 있는 타일 쪽에는 아무리 봐도 배수구가 없던 것. 나는 세수할 때 튀는 물은 그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며 화장실을 조심히 쓰고는 했다. 나는 익숙하게 샤워커튼을 욕조 안에 넣고 물을 튼다.
아이들의 꿈나라를 깨트리기 위해 옆 방으로 간다. 아침잠이 많은 아이들을 깨우고 짐 정리를 마저 한다. 오늘의 아침은 모아나와 마테오가 숙소 근처에서 사 온 샌드위치. 패션후르츠 주스를 컵에 따라 한 모금 먼저 마시고 샌드위치를 베어 문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콤함이 감도는 소스에 닭가슴살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닭가슴살인지 조개관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생김새와 식감이 독특하다. 처음 먹는 맛이다. 양상추, 달걀, 토마토와 같은 익숙한 재료가 섞여 있음에도 오묘한 풍미가 입안을 자극한다. 모두 갸우뚱한 표정이다. 1층 숙소에 있는 남자 친구들의 반응을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층 사람들은 대체로 반 이상을 남겼으며 아이들 일부는 먹기를 거부했다. 처음 도전하는 낯선 음식이 입맛에 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우리는 때때로 실패하기도 한다.
주방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네덜란드로 향하는 오늘의 일정을 이야기하던 평화로운 아침. 잠에서 깬 유진이 겨우 일어나 비몽사몽 화장실에 간다. 딱딱한 바게트 빵을 한 입 물 때마다 빵 부스러기가 사방팔방으로 떨어져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때다. 거실에 있던 한 사람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소리친다. 모두의 시선이 화장실 앞 복도로 꽂힌다. 어느 순간부터 복도에 물이 스멀스멀 깔리고 있던 것.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물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알기 위해 나와 모아나는 다급히 화장실 앞으로 가서 유진과 대화를 시도했다. 함께 아침을 먹던 마테오가 급한 대로 그릇으로 물을 퍼서 냄비에 담기 시작했다. 함께 있던 비버(중학교 동창, 졸업 이후 여행에서 처음 만났다)도 그를 힘껏 도왔다.
화장실 문에는 위아래로 누르는 열쇠 모양 잠금장치가 있는데, 처음부터 열쇠가 구멍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걸쳐져 있는 상태였다.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려고 할 때, 문에서 열쇠가 툭 하고 빠져 버려 당황한 기억이 있다. 다행히 구멍에 열쇠를 꽂아두면 위태롭게 걸쳐지긴 했으나, 애초에 잠금의 기능을 못하는 듯했다. 사소하더라도 작은 이슈를 발견하면 그것을 모두에게 공유하는 게 맞는데, 미처 그러지 못했다. 사용해 보면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니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일했다.
굳게 잠긴 문은 미동도 없고 물은 쉴 새 없이 흘러 침대가 있는 방까지 흘렀다. 급하게 수건으로 문 앞을 막고 바닥에 넘친 물을 퍼 담아 싱크대에 버리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 사이 유진은 화장실 안에서 키를 마구잡이로 쑤셔대다가 결국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렇다고 이 숙소에 마스터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화장실 문과 바닥 사이에 작은 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화장실 열쇠를 밖으로 던져달라고 했다. 너무도 다행히 바닥 틈 사이로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빠진 열쇠는 위치에 맞게 꼽은 뒤 특정 방향으로 밀면서 돌려야만 잠금이 풀렸다. 오직 감으로 열쇠의 위치를 정확히 두는 것조차 너무 어려웠다. 열쇠를 구멍에 넣을 때마다 무엇이 맞고 틀린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와 모아나는 밖에 있는 열쇠 구멍에 키를 이리저리 꼽으며 문과 사투를 벌였다. 옆에서는 민주가 유진과 대화를 도왔다.
민주: 유진아 욕조에 있는 샤워커튼 끝까지 치고 있어?
유진: 아니.
민주: 커튼 끝까지 치고 커튼을 욕조 안에 넣어야 해. 그래야 물이 밖으로 안 새.
유진: 알겠어.
샤워 커튼이 욕조 안에 있으면 물이 안으로 흘려서 문제가 없어야 정상인데, 그럼에도 이 홍수가 멈추지 않았다.
민주 유진아 커튼 안으로 넣었어?
유진 응.
민주 ..너 욕조 안에서 씻고 있어?
유진 (영문을 모른 채) 아니.
민주 (당황하며) 너 어디서 씻고 있어?
유진: 욕조 밖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유진이 샤워를 하기 위해 물을 튼 순간부터 사용된 물이 그대로 거실에 흐른 것이다. 일순간 모두가 벙찐 채 서로 눈치를 보았다. 특히 물을 퍼 담고 있던 마테오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이제 막 15살이 된 어린 친구다. 유럽이 처음이기에 건식 화장실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욕조에 들어가 씻기 싫었던 아이가 한국처럼 세면대 쪽에도 배수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을 과연 아이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리 알려주지 못한 우리 어른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화장실은 대부분 건식 구조로 되어 있다. 욕조나 샤워부스를 제외한 다른 공간에는 배수구가 없다. 나 또한 미국에서 처음 건식 화장실을 접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바닥에 물이 흥건해졌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배수구가 없는 것이다. 바닥을 말리려고 화장실 문을 열어뒀던 기억이 있다. 말 그대로 bath-room. 욕조가 있는 방이다. 일부 화장실은 세면대 공간이 카펫으로 깔려 있어 구분이 쉽지만 우리 숙소는 세면대 바닥이 타일로 되어 있어 모르는 상태라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은 이상 알기 어려운 지식이었을 것이다.
화장실 문을 겨우 열고 나서야 상황이 종결되었다. 샤워를 마친 유진이 행여 다른 팀원들의 눈치를 보고 주눅 들어 있을까 걱정이 되어 유진의 침대로 갔다. 그녀는 밖에서 일어난 전쟁 같은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끄러움을 숨기는 건지 전혀 타격이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괜찮냐는 물음에 약간 어리둥절하며 “네”라고 답한 그녀를 보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없던 사건이 얼추 마무리될 무렵, 바로 밑에 있는 1층 남자 숙소에서 연락이 왔다.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흐른다는 것.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라 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듯 흐르는 상황이었다. 자칫 건물 전체에 누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화장실을 사용하지 말라고 전했다. 마저 씻지 못한 남학생들은 2층으로 올라와 준비를 마무리했고, 우리는 서둘러 떠날 준비를 마무리했다.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의 연속이라 늘 짜릿하지만, 피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더 나아가 마주친 사건을 어떠한 관점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결말이 달라질 수 있다. 아픈 경험이 힘을 주는 교훈이 될 수도 있고 그저 기분 나쁜 순간으로 기억되어 기분을 망치게 둘 수도 있다. 바라보는 시선은 늘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오늘의 사건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어 다행이다. 이러나저러나 여행은 계속된다. 우리는 벨기에를 꿀꺽 삼키고 네덜란드로 향한다. 차를 타고 이동한 지 10여 분이 지났을까? 유진이 나를 부른다.
“주디쌤, 숙소에 신발을 두고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