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눈물을 흘리며) 저 여행이 싫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누구나 커가면서 성장통을 앓는다. 지독한 짝사랑을 하기도 하고,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며, 꿈에 닿기 위해 열정을 태우기도 한다. 물론 누군가와 다투기도, 의심하는 일도 생기지만 우리는 실패와 경험을 통해 성장해 나간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아플지라도 이겨내면 별 거 아니게 느껴지는 일도 있다.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안 좋은 일도 지나고 나면 꼭 안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온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한 사람의 마음속 꽃이 시들게 된 것도, 그 꽃이 다시 피어나는 과정에도 함께했다. 여행이 끝난 뒤 그녀가 전한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때는 풍차를 보러 잔세 스칸스(Zaanse Schans)로 향한 어느 날. 17~18세기에 지어진 풍차와 목조 건축물이 남아 있는 마을이라지만 계절감이 맞지 않아서인지 허허벌판에 온 기분이다. 입구 앞에서 다시 모일 시간을 공지하자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입구를 서성이던 민주는 나와 걸음을 함께 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내게 사소하다는 듯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녀가 내게 애써 지은 미소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최면과도 같은 표정이었지만, 슬픈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남매와 자매끼리, 친척 지간끼리, 혹은 친구와 함께 이번 여행에 왔다. 서로에게 의지할 구석이 조금이나마 있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오해가 쌓인 듯하다. 민주는 자신이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사건*이 있다는 것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
우솔(16)-수현(17): 사촌
민주(17)-규빈(15): 자매
규빈(15)-유진(15): 친구
사건 1: 수현과 민주
사건 2: 아이들의 행동
잔세 스칸스에서 민주의 고백
사건 3-1: 민주와 우솔
사건 3-2: 우솔의 취미
사건 1
영국 숙소에서 민주가 쌍꺼풀테이프를 잃어버린다. 규빈에게 이야기하며 속상해한다. 같은 방을 쓰던 수현이 어렴풋이 듣는다. 며칠 뒤 수현은 자신의 물건을 잃어버린다. 같은 날 민주가 자신의 물건을 찾았다며 기뻐한다. 수현은 본인의 물건을 민주가 자신의 것인 마냥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수현은 기분이 나쁘다. 민주에게 말하지 않은 채 마음이 상한다.
사건 2
남자아이들은 유독 수현을 졸졸 따른다. 마음이 상한 수현이 자신도 모르게 민주에게 차갑게 대한다. 아이들은 자연스레 수현의 행동에 따라 민주를 대한다. 크고 작은 놀림거리를 만들어 민주를 괴롭힌다.
사건 3-1
아울렛에서 쇼핑을 마치고 암스테르담 숙소에서 돌아온다. 8인실에 모인 여자 아이들에게 자유시간을 알린다. 그날 저녁, 우솔이 갑자기 펑펑 운다. 낮에 사 온 티셔츠를 방에서 잃어버렸다는 것. 숙소 바닥에 펼쳐져 있던 민주의 캐리어를 뒤져봤는데, 자신의 티셔츠가 캐리어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사건 3-2
앞서 언급한 모든 사건이 휘몰아친 뒤 모아나와 이 사건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던 밤. 유진, 규빈, 민주가 사색이 되어 뛰어온다. 우솔이 방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는 것. 비디오로 촬영되고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며 아이들이 흥분이 고조된다. 늦은 밤, 민주의 서글픈 울분이 터진다.
민주가 풍차마을에서 속마음을 고백한 그날, 두 개의 사건이 한 날에 연달아 일어났다. 갈등은 한순간 바람으로 인해 산불처럼 번져 재앙을 가져왔다. 마테오와 모아나와 나는 결국 오밤중에 모두를 불러 대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아이들의 마음만 더욱 얼룩진 채 급하게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민주와 수현은 다이소에서 파는 똑같은 쌍꺼풀테이프를 가지고 있었고, 우솔과 민주는 그날 나이키 아울렛에서 검은색에 로고만 덜렁 있는 기본 스타일 티셔츠를 샀고, 핸드폰 카메라를 셀카모드로 하고 춤 영상을 찍는 취미가 있는 우솔은 그날 밤도 춤을 추고 있었을 뿐이다. 진실을 밝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감정이 상한 아이들의 마음을 살펴주어야 했고 틀어질 대로 틀어진 아이들의 관계를 회복시켜야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아나와 나도 벅차긴 마찬가지였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민주의 울음이 터져버렸다. 모아나와 나는 침묵을 깨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그녀를 다독여줬다. 모아나는 자신도 그러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며 아픔을 공감해 주었고, 나는 타인이 그녀를 어떻게 판단하던 결국 자기 자신은 자기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늘 밝게 웃고 가끔 엉뚱하고 동생과 투닥대던 건강한 아이가 이토록 서럽게 울고 있는데,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어 미안할 뿐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한 달을 낯선 땅에서 생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아직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더욱이. 민주는 그날 밤 “여행이 싫다”라고 말했다. 이 어린아이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다. 이번 일로 인해 민주가 여행이 영영 싫어지게 된다면.. 그건 나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잘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옆에 있어주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일. 나는 그날 이후로 민주와 규빈과 유진이 타고 있던 3호차 조수석을 차지했다. 그 자리를 타던 남자 인솔자 하빈은 내게 선뜻 자리를 내어 주었다. 나의 등장이 반갑지 않던 규빈과 유진은 하빈의 존재를 그리워한다(그는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재밌는 사람이다). 특히 규빈이 내게 차에서 내리라고 말했을 때는 충격이 컸으며 정말 서운했다. 철든 민주와 운전하던 양은 내 눈치를 보며 아이를 타일렀다. 모진 말을 하고도 그런 말이 튀어나온 것에 당황한 듯 두서없는 말을 뱉는 규빈. 나는 아이를 이해하기로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상처를 안아줄 수 있는 것?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 경험이 많다는 것? 어른이 되지 못한 나는 끝내 답을 찾지 못한다. 사건의 잔해가 남긴 결말은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나의 행동, 내가 선택하는 단어와 문장의 결, 그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서 습득하게 될 또 다른 누군가가 생길 테니. 그렇게 또다시 여행길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