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축하해

암스테르담

by 쥬링

생일과 크리스마스. 어릴 적 가장 기다리던 날이다. 생일은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출산의 고통을 이겨낸 어머니에게 더욱 특별해야 마땅한 날일 텐데 축하와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것은 생일 당사자이다. 학교에 다닐 때가 되면 생일은 더 즐거워진다. 친구들이 준비한 깜짝 파티나 선물이나 편지 같은 것을 받을 수 있으니. 나의 생일은 방학과 겹쳐 있어 소박하고 귀여운 생일을 보내왔지만, 친구의 생일을 위해 재밌는 파티를 계획한 적이 종종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축하받는 것의 감사함을 깨닫는다. 바쁜 일상에 틈을 내어 먼저 연락 준다는 것, 나를 떠올려주고 기억해 준다는 것에 감동받는다. 모순되지만 고마움이 커질수록 생일은 무뎌진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생일이 뭐 특별할 게 있냐는 마냥. 타인의 생일 선물에는 며칠씩 고민하면서 자신의 생일은 함부로 대한다. 이제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을지 생크림 케이크를 먹을지 고르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빠에게 갖고 싶은 물건을 생일 선물로 먼저 말하지 않게 되었다. 촛불 때문에 평소에 찾지도 않는 케이크를 먹고 싶지 않고,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기면 내가 사면 그만이다. 무뎌지는 생일의 장점은 많은 축하를 받지 않아도 행복한 것이고, 단점은 특별함을 느낄 날이 줄어든다는 것. 하지만 올해 생일은 그 어느 해보다 기뻤다.


암스테르담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프런트 데스크 스태프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물었고, 우리는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가 너무나 반가워하며 라운지 음악을 K-pop으로 재생시켜 줬다. 따뜻한 마음이 고마웠지만, 그의 친절은 우리가 한국에 있는지 네덜란드에 있는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나와 모아나는 여자 아이들을 데리고 이층 침대가 있는 8인실로 갔다. 모두가 한 방에서 머무는 날인만큼 2층과 1층 침대를 누가 쓸지 정했다. 나는 어느 침대를 쓰던 다 괜찮아서 모아나에게 선택권을 양보했고 모아나는 1층 침대를 쓰고 싶었는지 내게 많이 고마워했다. 우리는 짐을 풀고 숙소에 무엇이 있는지 둘러보기로 한다. 라운지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과 복층으로 이어지는 원형 철계단이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소파가 있는 작은 공간이 나온다. 빨간 1인용 소파 위에는 검은 고양이가 그루밍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길이 깔끔하고 식당도 청결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우리가 머무는 숙소도 정말 깔끔하고 사려 깊었다. 특히 공용 화장실 앞 세면대에는 탐폰과 생리대가 사이즈별로 구비되어 있었는데, 필요한 사람은 편하게 가져가라는 메모가 나의 마음을 울렸다.


시침과 분침이 숫자 12와 가까워진다. 몇 분 뒤면 나의 생일이다. 유일하게 이번 여행에 생일이 겹쳐 있는 사람이다. 이전에 생일이 언제인지 먼저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이들과 친해지는 과정에서 정보(mbti, 생일, 전공 등)를 나누다 보니 나의 생일이 공개된 적이 있다. 늦은 저녁, 방울토마토가 먹고 싶어서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마트로 향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마트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수상한 소리와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포착하게 된다. 뒤이어 들리는 한국어. "야, 주디다. 숨어. 숨어." 비버가 몇몇 친구들과 마트에 있던 것. 나는 하필 출구를 입구로 알고 잘못된 문으로 들어갔던 찰나였고, 친구들을 본 척하기에는 그들은 이미 멀리 있었다. 나는 모른 척 입구가 있는 문으로 돌아간다. 친구들이 왜 나를 대놓고 피했는지 알듯 말듯했다.


그날 밤, 진지하게 나를 부르는 마테오. 어딘가 모르게 횡설수설하며 어설픈 연기를 하는 그. 나는 그의 노력을 알고 속는 척 그를 따라간다. 그가 문을 열었고 나는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방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하나둘씩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한 사람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어둠 속에 옹기종기 모인 친구들(스무 살이 넘는 사람들만 모였다). 친구들의 행동이 평소와 달라 긴가민가 했는데, 실재를 마주한 순간 고마움과 행복이 넘쳐흘렀다. 작고 소중한 불빛을 내고 있는 생일초를 앞에 두고 이 여정에 함께 하는 이들과 행복을 나누게 해달라고 짧게 소원을 빌고 짧은 숨을 뱉었다. 나는 97년생이랑 학교를 같이 다닌 98년생인데. 사실상 25살인데. 숫자 2와 6이 빵 위에 꼽혀 있다. 그것도 6이 먼저 오고 2가 뒤로 오게. 그의 장난기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어, 초가 꼽혀 있는 빵이 조금 낯익다. 벨기에 숙소에서 아침에 냉장고에서 본 빵이다. 알고 보니 벨기에에서 아침을 사러 나갔을 때부터 생일 케이크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케이크를 찾기 못해 초콜릿 카스테라를 사 두었었는데, 내가 냉장고를 열었을 때(숙소에서 출발하기 전에 놓고 가는 물건이 없나 확인하는 과정에서 냉장고를 열었었다) 빵을 보고 눈치챈 줄 알았다고. 나는 그 빵이 일단 케이크인 줄 전혀 몰랐고, 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케이크가 될 것이라는 역시 상상하지 못했다.


누군가 방의 불을 켜자 친구들이 각자 준비한 초콜릿을 꺼내 내게 건넨다. 초콜릿.!! 이건 분명 비버의 계획일 것이다. 오늘 낮에 들른 나이키 아울렛에서 비버에게 보는 물건마다 "나 이거 사 줘."라고 잠시 장난치고 다녔다. 나는 아울렛에서 사고 싶은 물건이 없었고 그냥 있는 게 심심하기도 했고 오늘은 내 생일이고 그는 나의 오랜 친구니까. 그 뒤로 비버가 받고 싶은 선물이 있는지 나를 따라다니며 묻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을 보아하니 친구로서 함께 보내는 생일을 그냥 지나치는 게 부담이었나 보다. 사달라는 건 농담이었다고.. 괜찮아,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정말 괜찮아! 나는 몇 번을 동일하게 대답하다가 어느 순간 그가 진심으로 난감해한다는 것을 표정에서 읽었다. 그는 교촌치킨 이하 가격이면 괜찮다고 했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초콜릿?"이라고 말했다. 올리브영에 파는 손바닥만 한 정사각형 초콜릿처럼 작고 가격 부담이 없는 초콜릿. 젤리보다는 초콜릿을 좋아해서 떠올린 방안이며 여행 중에 야금야금 먹기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친구들에게 메이드 인 벨기에라고 적힌 고디바 초콜릿 상자 두 개와 핑크색 포일로 덮인 대왕 토끼 초콜릿과 소시지를 품에 안으며 부끄러워 고개를 채 다 들지 못한 채 고맙다는 말만 반복한다. 침대 가운데 임시로 놓은 테이블에는 카스테라 케이크와 팬케이크에 과자로 초를 만들어 장식한 또 하나의 생일 케이크, 짭조름한 감자칩과 나쵸, 샐러드와 과일과 캔맥주가 있었다. 우리는 실컷 먹고 맥주를 홀짝이면서 늦은 새벽까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함께라는 의미가 여행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게 해 준 마음 따뜻한 친구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매일 챙기고 맛있는 과자 브랜드를 찾으면 알려주고 부은 얼굴과 민낯을 공유하며 알게 모르게 가까워진 듯하다. 우리는 그간 지나온 여행 이야기도 하고 침묵의 젠가 게임도 한다. 어느 순간 웃음이 터지면 막 웃다가도 서로를 조용히 시키느라 작게 키득대며 우정을 쌓는다. 밤하늘에는 초승의 빛이 일렁이고 구름 사이로 별들의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2023,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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