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늘은 여행 전반부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날이다. 우리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 바로 디즈니랜드. 네덜란드 사건 이후로 여자 아이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있지만 스위스와 파리에서 여자 모두가 한 숙소에서 지내게 되면서 최소한의 접촉을 허용하는 중이다. 모아나와 나는 번갈아가면서 아이들과 숙소를 같이 쓰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서로의 개인 시간을 조금 더 존중하자는 의미이다. 나는 스위스 숙소에서 여학생들과 떨어진 방을 쓰게 되었는데, 내가 담당하는 세 아이들이 나도 방에 함께 있어주면 좋겠다며 "주디쌤 가지 마요."라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함께 방을 쓰기로 한다. 렌터카에서 날카로운 말로 나를 밀어내던 아이들이 머릿속에 스친다. 그랬던 아이들이 어느새 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내심 기분 좋았지만 일부러 더 삐진 티를 냈다. 오늘은 광활한 놀이공원 안에서 각자의 자유를 누리는 시간인만큼 서로의 눈치를 볼 필요도, 억지로 한 공간에 있을 필요도 없어 아이들 얼굴에 조금의 편안함이 흐른다.
호텔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10여 분을 달린 뒤 놀이공원 입구가 있는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날은 흐리지만 파란 마술사 모자를 쓴 귀여운 미키마우스가 핑크색 정문 정중앙을 웃는 얼굴로 지키고 있다. 오늘이 확 와닿는다. 우리는 테마파크 오픈 시간 전에 도착해 각자 티켓을 받기 위해 마테오를 기다린다. 버스에서부터 핸드폰을 연신 확인하던 마테오의 낯빛이 흐린 날씨보다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마테오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긴 채 어딘가로 뛰어간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놀이동산 입구 앞에서 한 시간가량을 대기한다. 입장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밖에 있는 기념품샵만 들락날락하며 시간을 보낸다. 얼마 뒤 마테오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 디즈니랜드에 갈 수 없게 되었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러했다. 여행을 계획할 당시에 정체불명의 해외 사이트에서 전체 인원의 테마파크 입장권을 구매한 마테오. 며칠 뒤 그의 이메일로 바우처가 도착한다. 그는 이메일이 온 것만 확인하고 바우처를 다운로드하여서 보지 않는다. 디즈니랜드 여정 하루 전, 메일함을 열어 오래전에 도착한 바우처를 확인한다. 머지않아 그의 마음에 불안이 엄습한다. 바우처에 표기되어 있는 입장 날짜가 과거인 것이다. 디즈니랜드에 도착한 뒤 바우처를 입구에서 내밀었지만 해당 바우처로는 입장할 수 없다는 말이 돌아올 뿐이었다. 충분히 방지할 수 있던 경우의 수라 이 상황을 더욱 인정하기 싫었다. 나의 속상함은 파스텔 톤으로 가득 찬 디즈니랜드를 무채색으로 만든다. 서운한 마음에 정문 앞 분수대로 가서 친구들과 단체 사진을 찍기로 한다. 누군가에게 촬영을 부탁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히잡을 쓴 가족을 발견한다. 나는 그녀에게 촬영을 부탁한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우리를 도운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결과물을 본다. 모두가 웃음이 터진다. 인물사진의 각도를 완전히 파괴한 사진이었다. 우리는 사진 오른쪽에 옹기종기 치우쳐 있었고 그렇다고 왼쪽을 채우는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새삼 사진 구도에 진심인 한국인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기념품을 파는 작은 마차 주변을 기웃댄다. 비버가 나를 보며 막 웃는다. "오늘 디즈니랜드 간다고 꾸미고 왔는데 못 가게 돼서 기념품만 보고 있네."라며 나를 찍어서 보여준다. 나의 걸음에 서글픔이 묻어나 있는 것이 느껴진다.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인솔자들은 오늘 일정을 어떻게 변경하면 좋을지 얘기하기 위해 일단 숙소에 가자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던 찰나에 핸드폰에 얼굴을 박고 있던 마테오가 외친다.
"됐다!"
그는 시험 삼아 비버를 입장시킨다. 비버는 활짝 웃으며 홀로 입장에 성공한다. 타 사이트에서 바우처를 찾아 당일 입장권을 구매한 것이다. 디즈니랜드 관계자가 오늘은 방문 인원이 많아 현장 예매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어서 완전히 포기 상태였는데, 그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우리 모두의 간절함이 닿은 것일까. 우울한 마음이 순식간에 행복으로 뒤집힌다. 시든 마음속 나무에 꽃이 만개한다. 단 시간에 이렇게 기분이 전환된 게 처음이라 나조차도 내가 너무 낯설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무사히 입장에 성공한다. 마테오는 아이들 모두를 입장시킨 뒤 지친 얼굴로 즐겁게 놀고 오라는 말을 건네며 숙소로 돌아간다.
두어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너그러이 용서하며 '오늘을 유의미한 시간으로 가득 채우리라'는 의지를 불태운다. 들어가자마자 늘어선 기념품샵에서 친구들과 홀린 듯이 캐릭터 모자를 하나씩 고른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모자를 선택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나는 중학생 때 친구들과 롯데월드에 가서 빨간 리본 머리띠를 한 것 마냥 동심으로 돌아갔다. 다른 무리의 친구들이 지나가다 나를 보고 놀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어 신나게 놀이동산을 헤집고 다닌다. 점심도 거를 만큼 이 공간에 푹 빠진다. 어벤저스 코스튬을 한 사람들이 길에서 각자 캐릭터를 연기한다. 특히 닥터 스트레인지 역할을 맡은 사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조각 같은 그를 보자마자 카메라부터 켜는 나.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 정도는 돼야 디즈니에서 일할 수 있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밤까지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파이브가이즈에 가서 햄버거를 먹는다. 이 밤의 끝에는 퍼레이드(일루미네이션)가 남았다. 극명한 온도차를 느낀 아침을 떠올리며 일루미네이션을 기다린다. 지친 몇몇 아이들은 숙소로 돌아간다. 우리는 약속한 시간에 디즈니성 앞에서 모인다.
뿔뿔이 흩어져있던 입장객이 한 곳에 모이자 따스한 열기가 맴돈다. 영화에서 듣던 오프닝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짙은 밤하늘에 별이 된 드론. 저것은 미키마우스의 별자리일까. 마법사 모자를 쓴 미키마우스가 여행을 떠나는 콘셉트로 레이저쇼가 진행된다. 영화의 명장면이 성을 배경으로 가득 차고 ost가 흐른다. 완벽한 타이밍에 폭죽이 터진다. 몽글몽글한 감정이 벅차오르면서 나는 곧 낭만으로 휩싸인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자고 외치게 된다면 우리의 낭만을 디즈니랜드에서 약속하자고 다짐한다. 짙은 밤을 무대로 하는 불꽃처럼 어떤 어둠이 와도 함께 손잡고 막을 내리자고. 나는 흥분한 채 비버에게 오늘의 짜릿함을 마구 털어놓는다. 비버는 나의 꿈에 동화되어 먼 미래에 있을 사랑을 넌지시 응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