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는 마음 없이

파리-바르셀로나

by 쥬링

미워하는 마음, 어쩌면 그 모든 부정 어린 시선과 웃는 얼굴 뒤로 스며든 공허한 이기심은 자기 자신에게 선사하는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나는 모아나에게 좋은 여행 메이트가 되어주지 못했던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알아차리게 되었다.


모아나와 나는 이번 여행에서 여학생을 담당하는 인솔자로 처음 만났다. 그녀는 개인 일정이 있어 하루 늦게 영국에 홀로 도착했는데, 나는 숙소 리셉션에 그녀가 서 있던 첫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150cm가 조금 넘는 듯한 작은 체구를 가진 그녀는 자기 몸집만 한 캐리어를 옆에 두고 리셉션 스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커다란 캐리어와 길쭉한 카키색 야상으로 몸을 덮은 조그마한 친구.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는 꼬불꼬불 잘 말린 히피펌인데, 별명 붙이기를 좋아하는 유진은 그녀에게 모아나라는 애칭을 선물했다.


모아나는 늘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렌터카를 타고 이동하던 첫날, 나는 그녀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모아나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윤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와 그 시계 멋있다~

시계 자주 써?

아빠가 사주신 거야??

핸드폰으로 뭐 해?

무슨 게임이야?

어, 나도 그 게임 아는데~


연쇄 작용을 이루는 그녀의 틈새 없는 질문에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음 많던 윤이 조금씩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네, 아니오와 같은 짧은 단답형에서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한 두 문장 얹기 시작하는 그를 보고 모아나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 입이 심심했는지 젤리를 꺼낸 윤은 빨갛고 기다란 젤리 하나를 떼어 모아나에게 건넸다. 몇 시간 사이에 말랑해진 뒷좌석 분위기. 나는 사촌 언니 수빈이 떠올랐다. 말수가 적던 내게 늘 먼저 말을 건네주던 사람.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먼저 다가와 주는 것이 얼마나 넓고 따스한 마음에서 비롯되는지 알고 있다.

모아나와 나는 연애, 전공, 직업과 같은 소소한 얘기를 나누며 금세 친근해졌다. 나는 그녀가 캐주얼룩에 티파니 앤 코의 볼드한 실버 목걸이를 매칭한 것도, 청바지를 어그 부츠 안으로 넣을지 뺄지 고민하며 내게 의견을 구하는 것도, 오늘 저녁은 케밥을 먹자고 말하는 것도 좋았다. 인솔자로서 함께 일하는 것 이외에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의미니까.


그런 모아나가 네덜란드에서 아이들의 싸움을 중재한 뒤로 인솔 일에 스트레스를 받더니, 스트라스부르 캠핑장에서 우솔과 갈등이 생긴 뒤로 사뭇 변화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녀는 인솔자라는 책임을 고이 내려놓은 듯했다. 다 같이 걸을 때 뒤에서 걸어오는 남자 친구들 무리로 쏙 들어가 있어 아이들끼리 덩그러니 길을 걷는다거나 아이들만 있는 숙소에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밖에 나가 들어오지 않는다거나 하는 행동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챙기는 것은 점점 나의 몫이 되었지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일을 더 한다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친구로서, 그녀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바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시기에 모아나와 같은 여행 팀에 있던 K가 그녀와 진지한 관계가 되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팀의 분위기가 처음과 사뭇 달라졌다. 아마 다른 친구들 또한 둘의 관계를 지켜보는 게 불편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녀를 대하는 나의 마음속 시선의 변화가 분명히 나타났다. 나는 보잘것없는 질투와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정작 그녀에게 솔직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다. 어린 날의 미움은 적어도 솔직했다. 누군가와 사소한 이유로 토라지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게 되더라도 어느 순간 좋았던 기억을 그리워하며 수줍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는 했다. 싸움과 화해의 경계가 분명했다. 뒤돌아보니 서로를 오해하던 아이들이나 그녀를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판단해 슬쩍슬쩍 외면한 나 자신이나 다를 게 무엇이었나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럽다. 내가 아이들 곁에 더 머물면서 아이들을 챙긴 이유는 인솔자라는 직무 때문이 아닌, 순전히 내가 그렇게 마음을 쓰고 싶어서였다. 자발적인 나의 행동과 그녀의 변화한 행동은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인솔자로 왔지만 엄연한 여행자이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어리숙했고, 속 좁은 사람이었다. K만이 그녀의 깊은 면을 바라봐 주었을 것이다.


자라나는 미움은 억센 잡초와 같다. 뽑아내려고 마음먹지 않은 이상 절대 시들지 않는다. 잘 가꿔놓은 마음속 밭에 삐죽 튀어나와 토양의 자양분을 나눠 먹으며 원래 심겨 있던 모종 흉내를 낸다. 한 시절 미움이 지나갔다고 해도 어느 날 불쑥 다른 미움을 안고 나타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나의 미움은 다방면으로 자라왔다. 출퇴근길 지하철에 몰리는 인파, 쌓여가는 택배 상자와 다가오는 분리수거 날, 한 달 중에 두 번을 겨우 간 집 앞 헬스장과 고갈되는 체력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나약함과 같은 것들. 성격이 팔자라는 민주 아줌마(엄마의 오랜 친구)의 말씀처럼, 미움이 모진 말과 행동으로 번지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은 삶을 유연하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닥친 상황에서는 비좁은 마음을 내비칠 수 있지만, 상황을 곱씹고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마치 드라마의 다양한 캐릭터를 한 명씩 조명할 때 이 캐릭터도 이해하고 저 캐릭터도 이해하듯. 스스로를 비난하고 또 용서하면서 나의 균형을 다시금 찾아간다.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기나긴 기차여행이 시작된다. 전체 인원은 길고 긴 기차 칸에 나뉘고 서로서로 챙기고 돕는다. 각 칸의 리더가 인원 체크를 마치고 단톡에 인증 사진을 올린다. 열차가 출발하고 좌석에 앉자 누적된 스트레스가 감정을 헤집는다. 힘껏 울고 다 털어내자는 마음으로 이층 기차칸 복도에 있는 작은 소파로 자리를 옮긴다. 터진 눈물이 두 뺨을 지나게 내버려 둔다. 슬픔을 다독이며 한국에 있는 가까운 친구에게 쌓아둔 이야기를 와르르 쏟아내며. 나는 자리로 돌아와 선물 받은 고디바 초콜릿 상자를 꺼낸다. 진한 달콤함을 품은 해마 모양과 별 모양 초콜릿에 푹 빠지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회복된다. 앞으로 쏟아질 듯 위태롭게 졸고 있는 아이에게 목베개를 건네며, 달콤함을 나누며 노트에 글을 쓰며 잠들지 않는 6시간을 달랜다. 속력을 가하는 열차와 광활한 초원이 함께 달린다. 여행 제2막 시작이다.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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