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정열의 나라 스페인에는 자유분방한 연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버스 뒷 좌석에 앉아 여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주던 남성, 손을 잡고 걷다 한순간 멈춰 서더니 진한 키스를 나누던 중년 부부, 놀이터 바닥에 누워 서로를 꽉 껴안고 안 놓아주던 커플까지. 이들의 사랑이 온 도시에 스며들자 여행자는 자연스레 사랑 어린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게 된다. 모두가 사랑에 빠지는 곳. 특히 이곳의 겨울은 봄과 같은 따스함이 서려 있어 한여름의 열기는 얼마나 지독할지 상상하게 만든다.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낮을 견디고 해가 질 무렵이 되면 타파스 바로 가는 거야. 핑거 푸드를 집어 들고 오가는 사람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있지. 한참을 즐겁게 떠들다가 데낄라 샷을 입 안에 털어낸 뒤 라임 조각을 베어 물면 새콤한 과육이 데낄라 향을 입은 입안을 잠재워 줘. 우리는 거리로 나가 라틴 음악에 몸을 살랑이면서 춤을 추겠지. 그렇게 우리의 여름밤을 달래는 거야.'
나는 이곳의 낭만을 자꾸 들춰내며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떠올린다. 여름마다 나의 사랑을 앗아가던 고성의 해변을 떠올리며 지중해의 푸르름에 매료되고 싶음을 깨닫는다. 나는 자유 여행 시간이 주어지자마자 지체 없이 바다를 찾아 나선다. 기차로 1시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근사한 바다를 추천받는다. 나는 최소한의 짐을 꾸린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거리로 나선다. 도시에 내린 빛을 읽는 시간. 나는 애드 시런의 디럭스(deluxw) 앨범에 들어가 '바르셀로나'를 재생한다. 처음 이 곡을 듣게 된 순간부터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이.
"In Barcelona!"
강하게 가사를 뱉는 가수의 목소리 뒤로 이어지는 유쾌한 리듬과 나의 걸음이 경쾌하게 섞인다.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초행자의 시선을 당당히 드러낸다. 분주한 도시인들을 무심한 듯 스치지만, 사실 은밀한 관찰을 기울이는 중이다. 오늘의 쾌활한 몽상가는 그렇게 탄생한다.
허름한 기차역에는 시제스(Sitges)라고 쓰인 팻말이 덩그러니 있다. 이곳은 바르셀로나와 다르게 고요하고 잔잔하다. 혼자 남겨진 나는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 앞에 멈춰 선다. 길쭉하게 뻗은 솔잎이 지도 아래 그림자를 드리우고, 햇빛은 반짝 빛을 낸다. 나는 구글맵을 켜지 않고 해변을 향해 아래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은은한 베이지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거리에 채워져 있다. 골목 사이로 햇살을 받은 면이 노랗게 빛을 낸다. 탁한 하늘색을 띠는 빈티지한 차가 세상에서 가장 작을법한 교차로를 지난다. 아담한 꽃집을 지나다가 은빛 양동이에 뿌리를 내린 작은 레몬 나무를 바라본다. 그러다 꽃집에서 나온 주인과 이웃이 거리에 서서 나누는 한낮의 대화를 감상한다. 혼자 하는 여행에는 감정 없는 감탄사도 불필요한 대화도 필요하지 않다. 말로 뱉어지면서 사라질 감정들이 있다면 조용히 머금으면 된다. 나는 바다를 향해 걷다가 먹음직스럽게 포장된 컵과일을 2유로에 파는 과일 가게를 발견한다. 손질된 파인애플, 석류, 블루베리, 컵에 담긴 딸기와 키위까지. 나는 예쁜 색에 매료되어 한참 과일을 들여다보다가 키위의 초록이 퍽 마음에 들어 키위와 파인애플이 담긴 컵과일을 먹기로 정한다. 2유로 동전이 없어 50유로 지폐를 내밀었는데, 한눈에 봐도 체구가 나의 세 배는 될 법한 점원이 지폐를 불빛 쪽으로 들어 유심히 보더니 이내 거스름돈을 내민다. 은행에서 환전한 지폐는 내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위조일 가능성을 의심받는다. 나는 찝찝한 마음과 거스름돈을 서둘러 가방에 넣고 바다로 걸어간다.
골목길 끝에 다다르자 영화의 장면이 전환되듯 바다가 등장한다. 왼편 외곽으로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Sant Bartomeu i Santa Tecla de Sitges)이 있고 일정한 파도 소리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해변을 바라보는 하얗고 각진 빌라, 큼지막한 야자수, 아담한 해변과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 손수 만든 액세서리를 얇은 보자기 위에 올려두고 파는 길거리의 상인까지. 특별하지 않기에 더욱 특별한 마을이다. 나는 바다 깊숙이로 보드를 타고 패들링 하는 두 명의 서퍼를 발견한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윤슬과 두 서퍼의 움직임과, 짙고 푸른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동화되는 모습에 그간의 우울함이 치유된다. 그해 여름 서핑에 열정을 불태우던 내가 그리워진다. 뜨겁게 달궈진 벤치에 앉았다. 소풍날 점심에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 꺼내는 유치원생이 된 마냥 수줍게 컵과일을 꺼낸다. 동그랗게 잘린 키위를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서 팡팡 터져 기분이 좋아진다.
숙소에만 있던 몇몇 친구들이 나 홀로 바다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시제스에 도착했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위해 구글 맵에서 레스토랑을 검색한다. 첫 번째로 선택한 곳은 현지인 맛집이었는지 자리가 없었고 그곳에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던 두 번째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다. 넓은 테라스 좌석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화이트톤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테이블이 보인다. 사장으로 보이는 웨이터가 한 명 있었으며 그는 잘 정돈된 포마드 머리와 턱수염과 자주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내게 윙크를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와 주문을 받았다. 나는 흥 많은 뮤지컬 배우를 눈앞에서 보는 듯한 기분이어서 그 상황을 꽤 즐겼다. 우리는 메뉴판과 번역기 사이를 널뛰며 신중하게 음식을 골랐다. 해물 빠에야와 치킨 빠에야, 소고기와 양고기 스테이크, 피자 그리고 샹그리아, 맥주, 콜라. 처음 먹어보는 음식은 빠에야와 샹그리아다.
웨이터는 구두 주걱 같이 생긴 하얀 막대기가 꽂힌 커다란 저그를 테이블에 올려둔다. 검보랏빛을 띠는 샹그리아에는 오렌지인지 자몽인지 모를 과일 조각과 얼음이 담겨 있다. 나는 샹그리아를 휘저으며 친구의 잔과 나의 잔을 채운다. 과일의 단 맛이 잘 어우러진 시원한 와인, 여름 맛 주스. 완벽한 식당이다. 맛있는 음식, 즐거운 대화, 위험한 달콤함으로 한순간 취하게 만드는 샹그리아까지. 결국 알딸딸해진 한 친구가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며 귀여운 취기를 부린다. 그는 어딘지도 모르는 마트로 뛰어간다. 우리는 함께 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꽉 찬 하루. 나는 함께하는 여행의 기쁨을 조금씩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