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을 파는 사람들

런던

by 쥬링

처음 마주하는 세상에 놓일 때면 신체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게 된다. 계절이 머금은 색, 후각을 자극하는 향, 건축물이 뿜어내는 분위기, 햇살의 온도, 사물과 사람의 움직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초행자의 시선으로 도시의 단면을 수집하다 보면 어느 순간이 나의 살결과 맞닿는지 알게 된다. 맞닿은 순간에는 다양한 형용사가 따른다. 사랑스러움, 포근함, 환희, 때로는 어지러움, 어쩔 땐 경악. 나는 생생한 현상을 담기 위해 카메라의 각도를 이리저리 잡아 본다. 애정하는 노트와 0.3mm 펜을 꺼내 쌓인 이야기를 노트 한 면에 가득 새긴다. 꾹꾹 누르는 펜촉질이 쌓이면서 슬슬 아려오는 손. 나는 고통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적어 나간다. 부드러운 종이 질감과 서걱대는 샤프심 소리가 글과 나의 유대감을 향상한다.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글더미가 주는 오묘한 희열. 아, 그래서 떠나는 것을 좋아하나 보다. 광활한 세상을 파헤칠수록 내가 나일 확률이 올라간다.


런던에 머물던 몇 안 되는 나날은 드라마틱하게 하늘이 예뻤다. 영국은 대부분의 날이 흐리다고 알고 있었는데. 날씨 요정이 찾아온 걸까. 푸른 물감을 뿌린 하늘과 베이지색으로 칠한 클래식한 건물 사이로 움직이는 빨간 이층 버스, 튜브(지하철)를 표시하는 빨간 테두리를 가진 타원. 극명한 색의 대조가 도시의 상징이 되어 여행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무엇보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스쳐 지나가는 이들의 대화 틈으로 영국식 억양이 귀에 꽂힐 때면 내가 런던에 있다는 것이 더욱 선명해진다. 나는 되지도 않는 영국식 영어를 마음속으로 따라 해본다. 낯설지만 그렇게 낯설지 만은 않은, 익숙함과 새로움이 스며든 감각의 도시에서 우리의 여정이 시작된다. 생각보다 팀원이 많다는 것을 튜브를 탈 때 느꼈다. 열차가 오자 몇 칸에 거쳐 허겁지겁 올라타는 아이들을 보자 이상하게 가냘픈 웃음이 뱉어졌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걸으며 이동할 때는 걸음 폭이 작아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뒤처지는 여자 아이들을 챙기게 된다. 나는 정해진 틀이 있는 패키지여행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 여행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은 고맙게도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줬고, 나를 좋아해 줬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나를 웃게 만든다. 함께 온 대학생 친구들도 저마다의 개성과 스타일이 확실했는데, 그 덕분에 나는 친구들의 이름을 빠르게 외울 수 있었다. 우리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간다.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 역 주변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향하기 전 분수 앞에 모였다. 마테오는 아이들을 데리고 숙소에 먼저 갈 테니 자유 시간을 원하는 사람들은 더 둘러보고 오라고 말한다. 자유시간!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피카딜리 서커스에 남는다. 어디를 다녀올까.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고민을 하다가 언젠가 영국이나 프랑스에 가면 빈티지 마켓에 가고 싶다고 유튜브 영상을 보며 다짐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검색 끝에 포토벨로 마켓(Portobello Road Market)으로 향한다. 주말이었고, 마켓에 도착하면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이곳에 가면 영화 노팅힐에 나온 서점도 있다고 하니 가보기로 한다. 사실 자유시간이 있게 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서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찾아보고 올 걸 그랬다!


마켓 초입에 들어서자 유리로 된 예쁜 그릇과 은접시와 식기류를 파는 한 곳을 발견했다. 주인아주머니의 취향이 담긴 물건에 한참 빠져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며 시간을 보냈다. 사고 싶은 마음과 앞으로 출국 전까지 유리를 어떻게 잘 가지고 다녀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지나치게 되었다. 그러다 옷을 파는 한 마켓에서 5유로짜리 갈색 아우터와 5유로짜리 하늘색 카디건을 만족스럽게 구매했다. 갈색 아우터 안에는 아이보리색으로 오리 가족이 프린팅 되어 귀여웠고 카디건은 내가 좋아하는 색과 니트 꼬임을 가지고 있었다. 소매 부분이 터져서 흰색 실로 꿰맨 흔적이 있었지만, 그것도 중고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음에 쏙 드는 그릇 가게로 돌아갔다. 물건이 거의 다 팔린 건지 마감을 위해 정리를 마무리해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테이블은 몇몇 제품을 남기고 거의 비어 있었다. 여행지에서 만큼은 마음에 드는 물건에게 관대해지자고, 고민을 조금 줄이자고 다짐한다. 이럴 때 나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은 ‘운명이 아니었나 봐.’라는 말. 이 마법 같은 문장 하나에 꽁 했던 마음이 풀린다. 옷을 사면서 생각하지 못한 점은 캐리어를 그만큼 차지할 거라는 것. 나는 그 뒤로 캐리어가 늘 꽉 차게 되었고, 보조 가방이 없으면 불어난 짐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보따리 장사꾼도 아니고.. 유리는 알면서 옷의 부피는 왜 생각을 못했을까.


마켓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눈을 감고 음악에 심취해 있던 흑인 할아버지. 그의 마켓은 분홍색과 흰색 줄무늬로 된 커다란 천이 천막 위를 덮고 있어 빛이 내려오면 핑크빛으로 반짝였고, 테이블은 보라색 벨벳 천으로 덮여 있어 강렬한 색채를 뽐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공간을 꽉 채우는 음악과 사람들을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물건을 보면서 천천히 걷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음악이 마켓의 분위기를 흥겹게 했고, 할아버지의 움직임은 춤선이 되었다. 나무로 된 뭔지 모를 악기들과 작은 피아노, 무심하게 쌓인 그림과 액자, 동서양을 아우르는 화병, 샹들리에와 각종 조명이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질서 있게 놓여 있다. 할아버지의 취향이 어김없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나는 이 공간에 한동안 매료된다. 취향을 가꾸는 사람들이 멋있다. 취향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우리는 취향을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된다. 유행이 빠르게 번지는 한국에서 고유한 취향을 드러내는 일은 변변치 않다. 멋있고 예쁜 것은 늘 정해져 있고, 광고비를 쏠쏠하게 버는 인플루언서가 이끄는 유행에 고민하다 매번 막차를 탄다. 나는 이런 서울의 삶이 지겨우면서도 안타깝다. 저마다의 독립적인 취향과 고유한 성질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오는 행복이 누구에게나 주어지길 소망하게 된다. 나는 밋밋한 공간을 입체적으로 채우던 음악을 다시 들으며 숙소로 향한다.



Better Love - Luther Vandross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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