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에 인솔 좀 하겠습니다

서울

by 쥬링

할 수 있지??

그럼요!

그래.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줘. 쌤은 지금 싱가포르야.


대표 인솔자 마테오가 이번 여행에서 ‘내가 맡게 될 일 중 오늘이 가장 난이도가 높을 것’이라며 앞으로 어려운 일이 없을 거라고 거듭 강조한다. 나는 반복적인 말에 일일이 답장하는 게 조금씩 귀찮아지지만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는 책임자의 무게를 이해하기로 한다.


팀원과 함께 영국에 도착해 숙소에 먼저 가 있기


마테오는 여행에 참여하는 몇몇 대학생 친구들과 레이오버(layover, 중간 경유지에서 24시간 미만 체류하는 경우)로 짧은 싱가포르 여행을 즐기고 있었고, 뚜비는 조식으로 먹을 음식과 여행 계획표를 전달하기 위해 공항에 왔지만, 개인 일정이 있어 2주 뒤에 여행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여학생을 담당하는 또 다른 인솔자도 개인 사정이 있어 우리와 출국일이 달랐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야간 비행을 앞둔 우리. 마테오와 더불어 이번 여행의 공동 대표를 맡은 뚜비가 멀찍이서 뛰어온다. 그녀는 이 일이 감당하기 버거웠는지 작별 인사를 할 때까지 얼이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내내 풍겼다. 앳된 중고등학생 아이들과 공항에 함께 온 몇몇 어머니와 풋풋한 대학생 친구들과 첫인사를 나눴다. 나는 뚜비에게 투명 지퍼백을 여러 개 받았다. 지퍼백 상단은 여자아이들 이름이 스테이플러 심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PVC 지퍼백과 지출 내용을 작성할 수 있는 간결한 양식이 같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들어 보니 지퍼백의 용도는 아주 명확했다. 미성년자 아이들이 부모 없이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서 여러 증빙서류를 가져왔는데, 지퍼백은 그 서류들을 보관할 파우치 대용이었다. 문제는 지퍼백 안에 있는 PVC 소재의 녀석이었다. 뚜비는 그것을 “용돈 파우치”라고 말하며 아이들의 용돈을 보관해 달라고 말했다. 분실 우려 때문이라고 했나. 아이들은 환전해 온 한 달 치 용돈과 두꺼운 서류 봉투를 나에게 맡겼다. 나라고 그 큰돈을 보관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솔직한 마음은 왜 용돈 관리까지 일일이 해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날부터 ATM 기계가 되었다. 며칠 뒤 나는 서비스 이용 가능 시간을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한정한다고 공표했다. 편의와 불편의 경계를 서로의 입장에서 최대한 잘 다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규칙을 적용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부 인원과 나만 다른 경유지를 거치는 것을 출발 당일에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일정(마테오 일행을 만나 다 같이 영국에 도착할 예정)이며, 나와 운전 담당 케빈, 그리고 4명의 아이들만 헬싱키를 경유하는 비행편인 것. 뚜비가 전체 일정표와 팀원 모두의 이름이 적힌 표를 주면서 설명할 때 비로소 마테오가 왜 그렇게 걱정을 했는지 깨달았다. 우리 항공편은 앞선 팀보다 5시간 먼저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마테오가 “시간 되면 킹스 크로스 역(King's Cross Station)에 있는 해리포터 샵도 구경하러 가고 그래. … 숙소에 가기 어려우면 공항에서 놀고 있어.”라고 말한 것이 이제야 실감 난다. 뚜비는 또 헐레벌떡 어딘가에 뛰어오더니 환전한 파운드가 담긴 봉투를 건네며 말한다.

“영국 도착하면 이 돈으로 교통카드 사면 돼~”



아이들은 늘 궁금한 것이 많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습득하고 알아가는 나이다. 보안 검색대 앞 대기 줄에서도, 출국장과 환승 게이트에서도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많다. 이들의 질문이 답할 틈도 주지 않고 냅다 귀로 달려온다. 예를 들면 기내 액체 반입 허용 용량이 왜 100ml인지, 손에 들고 있던 500ml 음료수 페트병을 빙빙 돌리며 안에 있는 음료수를 100ml만 남기고 보안검색대에 가져가도 되는지, 그러면 못 마신 음료수는 버려야 하는지 묻는다. 아이들의 질문은 보통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질문과 답변이 탁구공이 튕기듯 통통 오간다. 나는 4:1로 모든 질문을 받아치느라 서서히 영혼이 빠져나간다. 불현듯 오빠의 말이 길어질 때면 어김없이 꺼내는 엄마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네 오빠는 어릴 때나 커서나 늘 말이 많다.’, ‘너희 어릴 때는 서로 말하겠다고 엄청나게 싸웠다’. 나는 말이 많은 아이가 절대적으로 아니었지만, 엄마만 보면 이상하게 말이 많아졌다. 오빠는 언제나 말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 오빠랑 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팔걸이를 사이에 두고 말다툼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부모는 어떻게 쉴 새 없이 쫑알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을까? 나는 부모가 가진 위대한 사랑을 첫날 공항에서 어렴풋이 체감한다.


핀에어 기내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블루베리 주스의 완벽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두 번의 비행이 끝났다. 긴장감을 토해내던 민주가 마지막으로 입국 심사대를 지나면서 안도의 한숨을 뱉는다. 나는 미리 준비한 캡모자를 꺼내 기름진 머리를 서둘러 가린다. 규빈은 부스스한 앞머리를 매만지며 앙다문 입술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 주디쌤만 모자 챙겨 왔어요!”

“와~”

유진과 규빈의 눈빛에는 장난스러운 질투와 조금의 배신감과 부러움이 담겨 초롱초롱 빛난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귀엽다. 괜찮아, 너희는 안 가려도 예뻐!



나의 역할을 명확하게 말해준 사람은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이번 여행에서 인솔자의 역할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ATM 기계

구글 맵

음악 플레이어

보조배터리 대여소

통역사

물품 보관함

사진작가

요리사 혹은 요리 보조(가끔)

알람 시계

잔소리하는 엄마

든든한 친구


저마다의 순수를 품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한 명 한 명의 특징과 장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 친구들과는 여행 둘째 날 숙소 근처에 있는 수제 맥줏집에서 멋모르고 먹고 마시다가 계산서에 찍힌 40만 원에 다 함께 경악하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하필 제일 비싼 환율을 가진 나라에서 비싼 수제 맥주를 통닭집에서 시킨 500cc 맥주처럼 마음 편히 마신 것이다(그날 이후로 우리는 거하게 마시고 싶은 날이면 마트로 향했다). 결이 잘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혼자 하는 여행과 비교하면 질감부터가 다르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나눠 먹는 음식, 벅차오르는 순간을 함께 하는 것들이 모인다. 우리의 다정이 차가운 겨울 틈으로 포근하게 쌓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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