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 하우스의 침입자

런던

by 쥬링

우리는 다양한 숙소를 거쳐 왔다. 게스트 하우스, 아파트, 캠핑장, 이름만 호텔인 호스텔, 리조트까지. 팀원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숙소에서 여러 개의 방을 예약하게 되었는데, 가장 많은 예약을 차지한 곳은 게스트 하우스다. 여행사에 비용 절감 차원에서 게스트 하우스가 최선이었겠지만, 나는 게스트 하우스를 좋아한다. 각국의 여행자가 저마다의 이유로 찾은 도시에서 갖는 우연한 만남, 세계 각지의 음식이 조리되는 주방, 룸메이트와 스몰 토크를 하며 내적 친밀감을 쌓을 수 있는 아늑한 이층 침대까지. 저마다 개인 락카에 자물쇠를 걸지만, 암묵적인 믿음이 없으면 순순히 잠을 잘 수 없는 곳이자 혼자 온 여행자가 친구를 만들기 가장 쉬운 공간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숙소에서도 아이들을 챙기고 팀원들과 줄곧 시간을 보냈기에 게스트 하우스의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한 것이 조금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유일하게 혼자 게스트 하우스 방에 배정된 적이 있으니(여성 전용 룸에 한 명이 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성인 여성이 나밖에 없었다). 때는 런던에서의 일이다.


좁은 엘리베이터에 캐리어와 지친 몸을 싣고 4층으로 향했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정면으로는 각진 창문과 라디에이터와 누군가 걸어 둔 보라색 양말이 보이고 좁디좁은 방에 놓인 두 개의 이층 침대가 시야에 가득 찬다. 그 와중에 손바닥만 한 세면대와 거울이 방문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양치와 손 씻는 정도는 방에서 해결할 수 있어 보였다. 나는 이 작은 방에도 있을 건 다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대각선 방향으로 2층과 1층 침대에 한 명씩 방을 사용 중이었다. 나는 더 어두컴컴한 1층 침대에 짐을 내려놓으며 인사를 나눴다. 캐나다에서 온 브리트니와 독일에서 온 앤. 수줍음 많아 보이는 두 친구는 나긋하고 웃음이 예쁘고 배려심이 깊었다. 서울에서 긴 비행을 마치고 온 첫날, 온몸에 피곤이 강타한 나머지 아이들이 방에 잘 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방으로 올라갔다. 이른 저녁이기도 하고 아직 안 들어온 친구도 있어서 방의 불이 켜진 채로 선잠에 들었는데 누군가가 나의 모습을 보고선 잘 준비를 채 마치지 못했는데도 금방 불을 꺼주었다. 천사 같은 룸메이트를, 그것도 두 명이나 한 방에서 만나다니! 다음날 일정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오늘은 어디를 다녀왔는지, 런던은 얼마나 더 있을 예정인지 등을 물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국적이 달라도, 소통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눈빛과 행동으로 충분히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


런던의 첫 숙소



런던의 첫 숙소에서 이틀 차가 되자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났다. 그것도 친구와 함께. 금발의 긴 생머리, 과하게 번진 듯한 스모키 화장, 찢어진 검정 스타킹과 미니스커트 그리고 생로랑 핸드백. 한눈에 봐도 어려 보였다. 자정이 다 되는 늦은 밤에 입실한 금발 머리 친구는 침대 밑 캐비닛에 짐을 넣느라 끙끙대고 있었고 함께 온 친구는 방에 불빛이 없던 터라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하필 그녀가 고른 캐비닛조차 왜 오밤중에 이러냐는 듯이 한참을 녹슨 소리를 내며 삐그덕 댔다. 둘의 대화는 시끄러웠다. 하필 문도 열려 있어 복도에 대화가 울렸으며 지나가던 옆 방 사람들도 우리 방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날도 나는 일찍 잠들었는데, 요란한 소리에 어느 순간 깨어났다. 바로 옆 1층 침대를 쓰는 브리트니와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설픈 웃음을 보였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슬며시 전했다. 고개만 살짝 돌려도 누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다 보이는 좁은 방에 의도치 않게 다섯이 모였다. 언뜻 보니 금발 머리 소녀가 문을 잡고 있던 친구의 짐을 건네받아 캐비닛에 넣는 것 같았다.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다시 잠에 들고 싶을 뿐이었다. 이후 둘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 날이 돼서야 두 사람이 한 침대를 같이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셋째 날은 더 가관이었다. 두 친구는 너무나 당당하게 방을 썼다. 함께 이층 침대에 누워서는 "불 꺼도 될까?"라고 물어보는 둥 약간의 가식 섞인 웃음으로 웃는다는 둥, 나와 다른 친구들이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었다.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이런 황당무계한 경우를 침묵하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 고민에 빠지자, 나의 잠이 달아났다. 몇 시간밖에 못 자고 일어나야 하는 현실이 싫어져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나라와 도시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어 본 적이 있지만 이처럼 당당한 무단 침입자는 살면서 처음이다. 한 침대를 쓰는 두 친구가 연인 사이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동등한 권리를 가진 공간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 정작 미안한 내색 하나 없는 사람을 너그러이 받아들일 마음이 나에게 없었다. 나는 다음 날 새벽에 프랑스로 떠나서 괜찮지만, 방을 계속 사용할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니 더욱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브리트니와 앤은 절대 말을 못 하고 넘어갈 것 같았고 이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새벽이 밝자 빠르게 짐을 챙겨 로비로 향했다. 나는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프런트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졸린 내색 하나 없는 선명한 눈동자와 마주 보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404호 체크아웃하려고요. 혹시 한 침대에서 두 명이 함께 생활하는 게 가능한가요?

네? 한 침대를 두 명이요?

3번 침대를 두 명이 자고 있어요. 저는 체크아웃을 해서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요. 확인 부탁드려요.


런던의 밤이 더 남아 있는 친구들을 위한 일이자 나를 성장시키는 일. 마음속으로만 씩씩대고 참는 것을 잘하는 나는 명확한 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을 늘 동경해 왔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분명한 가치관이 있고 자존감이 높으며 무엇보다 마음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성격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가끔은 작은 행동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도블록을 소란스럽게 걷는 수십 개의 캐리어 바퀴 소리만 귀에 맴도는 짙푸른 새벽. 나의 용감한 태도에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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