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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윤 Mar 19. 2024

노오력이 부족해서 그래

모든 것이 공정하다는 착각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2


25살. 입사 1년 3개월 만의 퇴사. 그것도 전공과 관련된 직업.


이것은 내 인생에서의 어쩌면 가장 큰 포기이자 패기였다. 단순히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라고 인정했을 뿐인데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메커니즘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


'타고난 재능'보다는 '노력'의 가치를 우위에 두었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내가 무언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에는 위와 같은 말을 듣곤 했다. 아이를 기르는 입장에서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독려했던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좋은 성적을 받아올 때마다 주위 어른들에게 '노력에 대한 칭찬'을 받곤 했다. 그 희열과 뿌듯함은 엄청났다. 안 그래도 인정 욕구가 강한 아이였던 나에게는 마약과도 같았다. 끊을 수 없었다. 이 때는 정말 내가 반에서 1등으로 노력을 해서 1등을 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또래 집단과의 소통을 통해 어른들의 말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님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까지 오래 방황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언제까지나 착한 아이로 남아있고 싶은 겁쟁이였다.




완벽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이면에 안고 살았다.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는 곧 내 노력의 부족의 방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뭐든지 잘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에 대한 부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래!'.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자연히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불공정함 그 자체였다. 평균 이하에서 벗어나는 일은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특정 상위권의 영역은 어쩌면 각자마다 타고난 강점의 비중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걸 차츰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에서 가장 예쁜 아이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예뻤다.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만 있느라 60kg까지 몸무게가 불어나는 동안 함께 365일 붙어있던 친구는 아무리 먹어도 35kg에서 살이 찌지 않았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친구도 그랬다. 우리는 영어학원에서 가장 높은 반이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최소한 하루에 2~3시간 이상은 할애해야 겨우 커트라인 이상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친구는 학원가는 버스에서 "오늘은 몇 단원이냐?"라고 물은 뒤 책을 훑어보는 게 공부의 전부였다. 그리곤 언제나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곤 했다.


이때 느끼는 좌절감은 사춘기 시절 으레 느끼는 부러움 정도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자존감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왜 저렇게 되지 못할까. 아무리 노력해도 메울 수 없는 간극이 눈에 선명히 보였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물론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점점 상대적으로 나에게 부족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눈이 정말 나빴다. (지금은 시력 교정 수술을 했다.) 살면서 나보다 눈이 더 나쁜 사람은 지금까지 만나본 일이 없다. 3번 이상 렌즈를 압축해도 안경을 쓰면 눈이 절반 이상 작아졌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생길 나이에 그런 안경을 쓰고 다닌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지금도 컨디션이 떨어지면 이렇게 된다.


게다가 아토피도 심했다. 원래는 손과 발에만 있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두피까지 번져 한참 고생을 했다. 매일같이 머리를 감을 때마다 껍질이 다 벗겨지고 맨살이 드러났다. 물과 아토피용 샴푸가 닿을 때마다 너무 아팠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었다. 어깨에 내려앉은 각질 때문에 친구들이 '쟤는 공부하느라 머리 감을 시간도 없나 보다.'는 소문을 냈던 것. 피부염 때문이라고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떨어진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간호학과를 다니며 1000시간의 실습 때도, 수술실에 발령을 받은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선천적으로 발목이 약하다. 어릴 때부터 하도 자주 삐끗하여 별명이 '유리발목'이었다. 병원에서는 30대 중 한 번은 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게다가 평발까지 심하다. 상대적으로 허리가 긴 체형이라 허리 역시 자주 통증이 왔다. 오래 서 있는 데에 절대 유리한 신체 구조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다.



2017년 블로그의 일상글 중


하지만 나는 언제나 자책했다. 힘들어하는 나에게 엄마도 친구들도 "원래 다 그래. 왜 그렇게 아픈 걸 못 참니?"라고 핀잔을 주었다. 물론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래서 타인의 평가에도 쉽게 휘둘릴 필요가 없다. 지금은 잘 알지만 그 때는 몰랐다. 그래서 그 당시 블로그 글을 보면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표현까지 적어두었다.



낮아진 자존감이 열등감까지 불러왔다.


어느 순간부터 '진짜 나'는 없었다. 뭐든 목표한 만큼 해내지 못하는 껍데기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누군가 나의 아쉬운 점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 그것이 노력을 폄하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생각이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르며 알 수 없는 울분까지 차올랐다. 중증이었다.


이 굴레를 벗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뭘 잘할 수 있는 사람일까?



퇴사를 결정하고 위와 같은 고민을 처음으로 해보기 시작했다. 단지 공부를 잘했던 것과 블로그를 오래 운영했던 것을 제외하면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25살이면 스스로에 대한 탐구가 끝났어야 할 시기이지만 내가 성장하며 그런 기회는 크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적에 맞춰 진로의 선택지가 주어지고, 그중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것'을 선택!


특히나 성적이 좋았던 나는 더욱이 앞으로의 직업에 대한 고민을 크게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 '공부'나 '연구' 자체에 특히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 결국 사회에 나와서 1인분의 몫을 해야 하는 건 다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최근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김영훈 교수님의 <노력의 배신>을 읽었는데 깊은 공감이 되었다.


사회와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노력 신봉 공화국은 참 운영하기 좋은 사회이다.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면 되기 때문이다. 굶어 죽든, 취직이 안 되든, 좋은 직장의 숫자가 적든, 최저 임금이 적든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고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다.


재능과 노력은 정말 별개의 문제일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미각이 둔한 사람은 요리를 잘 안 하고, 음감이 둔한 사람은 노래를 잘 안 하게 될 것이다. 역시 신체가 기민하지 않다면 운동을 꺼려한다. 이게 사람의 본능이다.


한 번뿐인 인생, 그중에서도 찰나의 젊은 날이라면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일에 시간을 쏟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매몰비용의 오류에서 헤어 나와야 한다.


'내가 잘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 전에 살면서 꾸준히 해왔던 것들에 집중해 봤다. 앞서서 '공부가 좋아서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했지만 꾸역꾸역 10년 넘게 해왔으면 그것 역시 나의 재능과도 관련은 있을 것이다.


이것을 탐구하는 과정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이어가 보겠다.



공부와 노력의 관계성은 4%라는 충격적 연구





가벼워지지 않는 건반


내 방 한편에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께서 선물해 주신 삼익 피아노가 있다. 약 7살 무렵부터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학원에 있는 영창 피아노에 비해 건반이 무거워 속주 연습에 애를 먹었다.


이 사실을 말하니 엄마는 "학원 거는 학생들이 많이 쳐서 그래. 네가 열심히 연습하면 가벼워질 거야."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지금도 내 피아노 건반은 무겁다. 알고 보니 원래 삼익 브랜드 자체가 무겁다고 하더라. 27살 즈음 이 사실을 알고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충격과 배신감을 받았다.


엄마는 "그래도 덕분에 손가락 힘이 좋아졌잖니."라고 했다. 별 것 아니라는 듯. 진짜 나쁘다.





요즘의 나는 새로 마주하는 꽤 많은 일들에 각도기를 들고 다닌다.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빨리 포기하고 대안을 찾아보자!'


손절각을 재는 것이다.


누군가는 요즘 것들의 빠른 포기에 대해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많은 정보가 공개된 세상에서는 최대한 가능한 리스크를 파악하고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삶의 방식을 '빠른 손절 모드(?)'로 바꾸고 나서 받는 스트레스의 90% 이상이 줄어들었다. 최소한 지금은 통제할 수 있는 영역과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준으로 두고 지속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노력 자체의 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노력의 배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동양인의 과반 수 이상은 노력의 힘을 여전히 신봉하고 있다. 이것은 이 문화권 자체를 어느 정도 대변할 수 있는 수치이며 나 역시 그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완전하게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작정 '열심히' 노력하기 전이나 노력한 만큼 나오지 않은 성과에 대해 자책하기 전에 한 번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정말 내가 잘 일구어낼 수 있는 영역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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