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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윤 Mar 14. 2024

어머, 너 공부 잘하게 생겼다

반에서 1등이었던 아이 이야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1



나는 25살에 퇴사를 하고 백수가 되었다. 그리고 내 삶이 이렇게 흘러올 줄, 어린 시절의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은 그 시작을 적어본다.


이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한 발 떨어져 과거의 나를 바라보며 담담히 써 내려가지까지 어언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어머, 너 공부 잘하게 생겼다.



나는 선천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다. (지금은 안내렌즈 삽입술을 했는데 그 전의 시력은 -14 정도였다.)


실제 내가 대학생 때까지 착용했던 안경


7살 무렵부터 안경을 썼는데 그 당시 반에서 안경 쓴 초등학교 1학년 생은 40명 중 많아봐야 2, 3명이었다. 성인의 허리춤까지 오는 아이가 제 얼굴의 반만 한 안경을 뒤집어썼으니 얼마나 눈에 띄었겠는가. 엄마와 함께 미용실에 가든 마트에 가든 나를 본 어른들은 대부분 위와 같은 말을 했다.


물론 내 외모나 체형에 특출 나게 빼어난 부분이 있었다면 안경보다 더 큰 특징을 찾아 칭찬을 해주었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뭐 하나 두드러지지 않는 평범한 어린이였다.


분명 어른들에게 공부 잘하게 생겼다는 말은 칭찬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언제나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온 이후, 엄마는 "맞아요, 그래도 공부는 곧잘 하네요~"라는 말을 덧붙이시곤 했다.


때문에 나는 은연중에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남아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되면 나에게 더 이상 남는 것을 없을 것 같았다. 한 아이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그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공부가 싫었던 1등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 나의 수식어는 '그 공부 잘하는 얘' 혹은 '우리 반 1등'이었다.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수식어이기에 당시에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만큼 특색 없고 지루한 삶을 사는 아이였다.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 그리고 정규 교육 시간이 마친 방과 후에도 난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를 하며 보냈다. 방학 때도 다니던 영어 학원의 특강이 이어졌다. 제대로 놀고 쉰 기간이 있었냐고 하면 딱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가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냐고 하면 절대 아니다. 나는 확실히 학구열보다는 인정욕구가 컸던 아이였다.


단순히 공부하는 게 싫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것을 새로 배우든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한 번은 들 법도 한데 전혀 그런 적이 없었다. 시험 하나하나 끝낼 때마다 '해치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고 부족한 뇌용량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굴리느라 시험이 끝나면 바로 대부분의 것들을 애써 까먹곤 했다. 수학 문제를 풀 때도 해답지의 방식 외 다른 것은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스스로가 학업에 재능이 있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 또한 자연히 알게 되었다.



반에서 1등을 유지하니 자연스럽게 교내 영재반에도 들었고 영어학원에서도 가장 높은 반을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각 분야의 재능을 가진 비범한 아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중학생 시절, 나는 2시간 넘게 외워도 못 외우는 단어들을 10분 만에 암기해 버리곤 보는 시험마다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던 그 친구는 이름까지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3차원 그래프를 배우는데 아무리 상상해 봐도 머릿속에 Z 축이 그려지지 않던 나와는 달리 아무리 복잡한 도형도 이리저리 상상으로 돌려서 그려내던 그 친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하여 연구원이 되었다.


그럼에도 반에서 1등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기가 싫었다. 아니 무서웠다. '공부'를 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공부 외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다른 분야를 찾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좋은 대학만 가면


미련하게도 이 공부의 끝은 좋은 대학의 입학일 거라 믿었다. 정말 그것만을 위해 달렸다.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원하던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될 거야.'라는 생각을 되뇌었다.


그러는 사이 사회성 또한 일부 결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리 원활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예민한 또래 집단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일부 선생님들은 학업 성적이 우수했던 내 편을 들어주셨으니 그것이 몇몇에게는 말 그대로 재수 없어 보였을 것이다.


여러모로 내 10대 후반의 기억은 그리 좋지 못하다. 사실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것도, 친구의 제안이 있었긴 했지만 외로웠던 마음을 달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내 목표는 단 하나였다. 좋은 수능 성적과 의대 진학.




끝이 정해진 결말


그리고 어떻게 됐냐고?


수능을 치렀고, 보기 좋게 망했다. ('망했다'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지만 나는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망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의대 진학을 목표로 이과를 선택했는데, 아뿔싸. 이과 수학이 내 발목을 잡았다. 매일 2시간의 과외와 2시간의 자습 시간을 수학에만 할애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1등급은커녕 2등급에 발이라도 걸치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말인즉슨 국어와 영어는 그동안 쌓아놨던 것으로도 1등급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거다. 이러면 나는 사실 이과보단 문과 쪽 성향이 맞는구나! 를 깨달았어야 하는데.


이 사진과 함께 '도무지 어딜 봐서 직각이지?'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기하와 벡터와 관련된 정보를 아무리 머릿속에 밀어 넣어도 전혀 받아들여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진로를 변경한다던가 눈을 낮추는 선택을 할 용기는 없었다.


원리고 나발이고 이해는 안 갔지만 일단 보이는 모든 문제들의 풀이를 외우다시피 했다. 덕분인지 9월 모의고사에 수학 2등급을 받았고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수능 당일. 4점짜리 문제들을 2개 남겨놓고 다 풀었다는 기쁨도 잠시, 3점짜리 문제 1개에서 막혔고 그 이후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주관식 문제들 중 일부는 풀지도 못하고 찍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냐고? 영어 역시 처음으로 1등급보다 한참 낮은 점수를 받았다. 어차피 의대는 못 가는 거였거든.



죽는 게 낫겠다


그렇게 나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점수가 찍힌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진단을 받지는 않았지만 정신건강 쪽을 공부하면서 우울증 증상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19년 나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아쉬움이 1%라도 남았더라면 분명 재수를 결정했을 텐데 그럴 이유도 의지도 없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타이틀이 벗겨지고 나는 벌거벗은 채 덩그러니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뭘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고 여기에 대해 그 무엇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매일이 죽고 싶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수능 성적표를 받고 다음 날부터 학교도 출석하지 않았고 졸업식 역시 안 갔다. 그날 내가 받은 특별상도 친구가 대리수상했다. 그냥 하루하루 삶을 포기하는 생각만 했다.


이때 나를 잡아주셨던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수능을 봐서 의대를 진학할 성적을 받을 자신이 없었기에 여차저차 정시로 대학병원이 있는 간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일단 같은 의료 계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의전원이라는 길과 가까워 보였기 때문. 하지만 내가 입학한 2014년도의 봄, '의전원 폐지'라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꿈이 없는 아이


사실 의사는 나의 꿈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인정받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불타올랐을 뿐이다.


그럼 어떤 꿈이 있었나? 공부 외에는 특별히 다른 것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나뿐 아니라 인문계에서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을 밟아온 이들이라면 많이 공감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고 20살의 간호학과 1학년 학생이 된 나는, 우선 주어진 환경에서 다시 최선을 다해보기로 다짐한다.


그때까지도 '열심히 살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결국 나에게 맞는 길은 아니었다.


https://brunch.co.kr/@yoonjungnomad/58



다시 시작이다


그렇게 25살이 되어 다시 출발선에 섰다.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서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 선에는 나뿐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나를 앞서서 많은 이들이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던 일이 있었나? 처음이었다. 낯선 기분. 조급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당시에는 '학창 시절에 왜 굳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을까? 차라리 다른 경험들을 쌓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 5년이 지난 지금은, 그것이 뭐든 간에 하나에 미친 듯이 집중해 본 경험이 내가 삶을 태하는 태도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퇴사를 지르고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고쳐야 했던 것은 환경뿐이 아니었다.


-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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