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

by 유채운

사랑 영화를 잘보지 않는다. 뻔한 스토리텔링, 끈적한 노스탤지어, 억지스러운 간지러움에 기대어 유포되는 시중의 사랑 영화들은 매번 시간을 잡아먹었다는 기분만 남긴 채 짜증을 유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번이고 본 사랑 영화가 있는데 첫번째는 이안 감독의 <색,계>이고 두 번째는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이다. 사랑 영화라고 해도 최소 누군가 죽거나 피가 흘러야 보고 싶은 마음이 난다.

<색,계>는 사랑과 이념의 간극에 대해 다룬다. 여기서 사랑은 곧 삶이기도 하다. 젊은 독립운동가인 여주인공 왕자즈는 친일파의 수장인 이모청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위장하여 접근한다. 왕자즈와 이모청은 밀회한다. 하지만 그를 사살하기로 한 결전의 당일, 그러니까 이모청에게 고급 반지를 선물 받았던 그날 왕자즈는 이모청에게 당신이 위기에 처해있음을 털어놓게 된다. 이모청은 황급히 달아나 목숨을 구한다. 대신 이모청과 독립운동가 일당은 모두 처형 당한다.

왕자즈와 이모청의 사이에는 가학적인 섹스가 있다. 왜 굳이 가학적인 섹스인가. 귀엽고 달콤한 섹스와 이모청에 대한 아가페적인 연정 만으로는 독립운동과 친일파 처단이라는 절박한 대의마저 포기하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왕자즈의 변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가학적인 섹스가 표상하는 강렬한 신체적 욕망만이 그녀가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삶은 가깝고 이념은 멀다.

사회변혁을 염원하는 이들이 자주 간과하는 것이 일상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감각과 욕망이다. 흉포한 자본주의와 그에 포획당한 민중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들의 말들이 전적으로 관념 세계의 이야기라고 느낄 때가 많다. 자본주의의 저주가 전세계를 뒤덮은 오늘날에도 왜 쉽게 대규모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가? 대중매체에 의한 이데올로기 조작이 너무 훌륭해서? 아니면 민중들이 충분히 계몽되지 못했기 때문에? 펜대를 굴리는 이들과 다르게 노동자들은 체제의 내부에 있다. 그말인 즉슨 스트라이크에 동참하기 위해선 생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조업이 산업의 중심이던 시대에는 공장의 작동을 멈춤으로써 비교적 단순히 저항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지식산업 시대로 이행하면서 노동자가 처한 상황과 그들의 정체성은 조금 더 복잡해졌다. 이에 발맞춰 담론 생산이 부지런히 이뤄지고 있긴 하지만, 난감해진 상황을 설명하다보니 말과 글이 계속해서 난해해지고 그럴수록 일상세계의 생활감각과 꾸준히 멀어진다.

일찍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그 극점에 이르러 계급 모순에 의한 갈등으로 무너질 거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되려 사회주의 혁명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성공했다. 도시 노동자에 의한 봉기에 의해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당시 자본주의적 기반이 일천한 농업국가 상태에 놓인 중국과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안에서는 도시 노동자가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했지만 현실에서는 농민이 주체가 되었다. 언제나 삶과 이념은 괴리하고 겉돈다. 이념을 생각하는 이들은 언제나 본인이 믿는 것과 현실 주체들 사이의 당착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언제나 삶은 가깝고 이념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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