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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앙 Oct 21. 2023

13. 바다 예배

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 줍기




    끊김이 없는 소리가 밀려온다. "촤악. 푸르르르, 촤악."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바다의 등장은 삼단의 점층 구조를 갖는다. 멀리서는 냄새로, 가까이서는 소리로, 마침내는 눈앞에 나타난다. 나는 바다를 갈망했다가 설레었다가 예찬하게 된다. 특히 파도 소리는 내내 끊이지 않고 맴돌다가, 바다를 떠날 때는 헛헛한 공백으로써 또 한 번의 여운을 남긴다. 

    바다는 시원한 죽비 소리처럼 파도를 내리친다. 꼭 1초에 한 번씩 일침을 놓는 것 같다. '살아있는 놈이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 게냐.' 바다는 몇 만년에 걸쳐 붓다와 예수, 어부들을 가르쳐 오던 방식대로 가르침을 전한다. 나는 그들과 같은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다. 수평선에는 여태껏 어떤 건물도 들어서지 못했다. 그러니 과거의 그들도 이와 똑같은 광경 앞에 자리 잡고 앉았을 것이다. 역사 앞에 인간은 누구나 홀로 서 있다. 바다에서는 그 사실이 또렷해진다.


    바다에 머물면 무의식에도 파도의 박자감이 실리는 것만 같다. 나는 파도의 메트로놈에 맞춰 움직인다. 누군가의 심장 박동에 귀 기울이던 순간처럼 내면에는 고요함이 깔린다. 파도의 리듬 위에서는 어떠한 생각이든 노래 가사처럼 놓아둘 수 있다. 느릿한 포크 기타 리듬에는 아무 말이나 읊조려도 왠지 그럴듯한 말로 들리는 것처럼 바다는 그 어떤 말도 자연스럽게 받아준다.

    내 이야기를 밥 먹고 똥 누듯 예사스럽게 흡수하는 파도 앞에서 도리어 수많은 생각들은 무용해진다. 마음은 소재가 고갈될 정도로 모든 것을 토해낸 뒤에야 고요를 찾는다. 소리 때문인지 매일 아침 해오던 명상이 조금은 더 수월해졌다.


    바다라는 종교에는 문자화된 교리가 없다. 규칙을 만들거나 분파를 나누지도 않는다. 늘 한결같은 언어로 매일같이 기도회를 연다. 참석 자격에는 제한이 없다. 먹다 남은 쓰레기를 버리지만 않으면 누구나 모래 방석을 두고 앉을 수 있다. 우리는 무수한 생명들의 집회에 잠입한다. 바다는 자연의 섭리만을 교리로 삼는다. 물장구를 치는 일은 예배가 되고, 파도는 찬송가가 된다.

    기도석에 주저앉은 나는 정갈치 못한 자세로 무의미를 응시한다. 한동안 소금기 세례를 받고 나면 나는 갓 기립한 네 발 짐승으로 돌아간다. 인류의 첫걸음을 나의 발로 딛는다. 바다의 침례 의식은 그렇게 모든 것을 정화한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 불협화음처럼 떠오른다. 자신 없는 마음은 괜스레 슬리퍼를 질질 끌게 만든다. '드르륵 드르륵' 온 사방에 번뇌 가득한 표정을 뿌리며 바닷가에 닿는다.  

    떠밀려 온 해초와 나뭇가지들이 모래사장에 줄지어 있다. 바다에 너울너울 떠다니던 것들이 육지에 닿아 바닷물의 흔적 대로 늘어져 있다. 거룩한 바다도 요 앞 몇 센티미터 얕은 수심에 들러 잠시 쉬었다 간다. 수십억 년을 흘러 가녀린 모래에 닿았을 물 분자를 떠올린다. 수만 리 무시무시한 깊이의 바다를 거쳐 유역에 도달한 파도가 여기 와 발을 귀엽게 간질인다. 거룩하면서도 귀여울 수 있는 것이 여기 있다. 물과 불가분의 관계인 사람도 혹시 그런 존재일까 하는 희망을 갖는다. 바다의 으뜸화음이 간밤의 불협화음을 정리하듯 방점을 찍는다. "딴따안-딴."


    신화학에서는 물을 인간의 깊은 무의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바닷가에서 마음을 한 템포 늦추면 한 층 더 깊은 의식 세계와 싱크를 맞출 수 있다. 빙산의 숨겨진 본체는 이를 수 없이 거대하다. 우리는 저마다 내면의 바다를 발견하고는 스스로의 거룩한 면모를 인정하게 된다. 파도와 함께 마음을 흘러가게 두는 일은 고결한 명상에 가깝다. 소금에 절여진 마음은 한동안 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다를 찾는 마음은 예배회에 참석하듯 경건해진다.


    수평선에 초점을 두고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면 지구의 둥근 곡률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곳은 둥근 돌덩이. 사이사이를 바다가 가득 메운 행성이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지난 백 년간 바다는 1도를 끓었다. 냄비에 담긴 바다 국물은 점차 미지근해지고 있다. 전보다 다이빙을 하기 좋은 수온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끌어올린 높은 수온의 바닷물 속에서 사람들은 또 수영하기 좋다며 즐거워한다. 

    나도 유행을 따라 남쪽을 찾았다. 스노클링을 하며 속을 들여다본다. 최근 바다 연안의 산호들이 대거 죽어가고 있다. 살아있을 때 피부에 닿았다면 제법 따가웠을 산호들이다. 그들의 유해는 이제 연해 전반에 걸쳐 보드라운 자갈처럼 깔려있다. 수영하기에는 오히려 편안해진 셈이다. 백화된 산호는 속죄 없는 인간의 유골처럼 바다 안에 한가득 쌓여있다. 나는 조상의 비양심으로부터 더 큰 비양심의 당위를 얻는다. 나는 여전히 바다를 "자연"이라 쓰고 "수영하기 좋은 풀장"쯤으로 읽는다. 


    점차 끓어오르고 하얘지는 바다는 나의 거울이자 혼잡한 세상의 총체 같다. 그럼에도 바다는 혼란한 주검을 보듬어 말끔한 수평선으로 감싼다. 어리석은 사람에게조차 격 없이 그의 기도를 들어준다. 그러니 바닷가에 고쳐 앉은 탕자는 어머니에게도 하지 못할 고해성사를 늘어놓는다. 바다를 응망하는 동안에도 그곳에는 수많은 예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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