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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앙 Oct 21. 2023

12. 몬순

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 줍기


    눈으로 덮인 겨울은 실체를 숨긴다. 길고양이와 숲 속의 도마뱀, 시골집에 매인 강아지, 제각기 생동을 늦춘 존재들은 피부밑에 숨겨둔 내면을 바라본다. 견디는 것 외엔 할 게 없는 겨울은 감정의 시험을 받는 계절이다. 매해 시험에 빠지고 마는 나는 집 밖에 나가기를 주저하고 침잠한다. 그렇게 뼈가 아린 외로움은 봄이 되도록 뭉그적대다가, 여름이 돼서야 비로소 가신다.

    태양을 반바퀴 지나 다다른 여름은 숨어있던 몸의 비밀을 밝히기 시작한다. 만물은 가시광선의 스펙트럼을 휘황한 병풍처럼 펼쳐낸다. 능소화의 빨강, 금계국의 노랑, 안개 걷힌 하늘의 파랑, 파리 등짝의 보라, 지그시 감은 눈꺼풀로 투과하는 태양광의 주홍. 여름의 존재는 찬란하고 우렁차다. 겨울이 우울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항우울의 계절이다. 몸은 집 밖에 나가자고 아우성을 친다. 얼른 나가서 내리는 비라도 맞자는 식으로 달아오른다.


    여름에 하는 여행은 그래서 달다. 발바닥은 습도 높은 공기로 달짝지근해진 땅바닥에 착착 감긴다. 하나 여름은 꽤 귀찮은 소요를 유발하기도 한다. 눈은 녹음 짙은 자연을 감상하기에 바쁘고, 귀로는 짝을 찾는 새들과 파충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촉각은 땀 냄새를 맡은 날벌레가 들러붙는 통에 쉴 틈이 없고 강한 자외선은 벌레 물린 자리에 통증을 유발한다. 

    여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게 피어오를 즈음이면 때마침 비가 내려 상황을 갈무리 짓는다. 비는 막간의 인터미션이다. 변화무쌍했던 감각 세포들은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 하나에 젖어든다. 우리들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쉬어갈 틈을 얻는다. 


    방콕의 골목길에 돌연 비가 쏟아진다. 진한 흙바닥 냄새가 발산한다. 신발과 양말을 말리고, 깨진 보도블럭 틈에 고인 물웅덩이를 피해 걷는 일이 추가된다. 도리어 몸은 편안해진다. 꼬르륵 대는 소장의 연동과 옷자락과 피부의 마찰음이 한시에 잠잠해진다. 비가 풍기는 고릿한 냄새는 인간의 잡다한 냄새를 긍정하는 것만 같다. 빗소리와 냄새는 난측한 여름의 풍경을 잠시나마 잠재운다.  

    변화무쌍한 여름에는 물의 입자도 가만있지 못하고 요동을 친다. 열대성 몬순의 영향권에서는 달궈진 육지 쪽으로 바다가 습한 바람을 보내온다. 바다를 향해 오래도록 맞바람을 버티고 서도 눈이 건조해지지 않는다. 꾸덕꾸덕한 기류는 상대적 고온의 구름층으로 솟아 들어 똥똥한 먹구름을 만든다. 여름은 종일 후텁지근한 날씨로 사람들 옷깃을 헐겁게 만들다가도 불현듯 시원한 비를 뿌린다. 

    비는 몇 방울씩 짧게 기별을 보이다가 이내 모든 지붕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내린다. 거리에서 어깨를 부대끼던 사람들은 처마 밑을 찾아 삽시간에 흩어진다. 비는 세상의 물과 광물을 재분배하듯 사람들의 동선을 적당히 나누어 놓는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조금의 거리가 필요하다. 어깨를 스치는 과밀한 거리와 서로에게 지친 사람들은 비 덕에 울화를 면한다. 


    모든 울분을 쏟아내듯 비는 짧고 굵게 내린다. 비는 종잡을 수 없던 마음의 꼬리를 붙잡아 땅바닥으로 내리꽂는다. 사람들은 한바탕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 신나거나 골똘해진 표정으로 30분 내외의 시간을 기다린다. 비가 그치면 거리는 다시 발걸음으로 차오른다. 

    조금 전의 비가 열렬한 무대장치였던 것 마냥 한사코 무대를 휘젓고 나면 제2막이 시작된다. 거리는 새롭게 동전을 넣은 게임처럼 리셋된다. 옷깃으로 들어온 빗방울은 잠시간 차갑게 등덜미를 깨문다. '정신 차려.' 나는 들끓는 생각들을 겨울로 미뤄둔 채 새로이 부여받은 생명에 집중하기로 한다.

    한사코 지나간 비는 사람들 사이에 묘한 동질감을 남긴다. 한 곡의 음악에 함께 전율하는 콘서트장의 관객처럼 그 많은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비슷한 감상을 찾아낸다. 비는 시각과 촉각, 후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음악과 같다. 우리는 거센 비의 팬클럽, 사람들은 서로에게 살갗 한 겹을 더 내놓는다.


    땅바닥을 때린 진동이 지친 종아리 근육을 환기한다. 빗소리는 쉼 없이 반복되는 기타 리프처럼, 천둥은 베이스 드럼처럼 깔린다. 적당히 지친 나는 멈춰 서기만 하면 무엇이든 감상할 준비가 된 관객이다. 가만히 지켜보고 싶다. 가만히 듣고 싶다. 가수들이 겨우내 묵혀둔 노래를 꺼내는 계절도 그래서 여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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