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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앙 Oct 21. 2023

11. 과민성 대장 증후군

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 줍기


    커피를 좋아하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에게 여행 중 화장실은 끔찍하게 중요한 문제이다. 커피는 이뇨와 더불어 고요하던 장을 움찔하게 만든다. 붙박이 생활을 하던 때에는 여차하면 갈 수 있는 화장실 몇 군데쯤은 확보해 두었다. 버스를 기다리다 신호가 올 때 가는 상가 화장실 한 곳, 점심시간마다 찾는 직장 건물 내 화장실 한 곳. 하지만 국경을 넘으면 행인의 장 건강에 이렇게나 세심한 배려를 보이는 나라는 많지 않다. 


    간혹 공중화장실은커녕 자그마한 식당 하나 없는 곳을 지나가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니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화장실'이라는 의미의 현지 단어는 언제든 기억해 두어야 한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급한 나머지 시야가 서서히 좁혀 드는 그 시점에는 낯빛조차 간절해진다. 그 표정으로 '헝남, 헝남' 또는 '쎄니따리우, 반예이루', '토이레, 토이레'를 외치면 대부분 선의를 베풀어준다. 한국에서는 때가 되면 화장실이 내 앞에 와 있는 수준이었지만 여행지에서는 적극적으로 구하고 부탁해야 한다. 

    정말 급하지 않고서는 쉽게 부탁하지 못하는 성격인 나로서는 어쩌면 용변이 급할 때가 유일하게 외향인이 되는 순간이다. 피치 못할 이유로 낯선 이에게 손을 내밀고 간절히 그의 눈을 쳐다본다. 그가 내 손을 잡아줄 때 나는 '아직 살만한 세상이구나.' 절감한다. 세상은 용변이 급한 이의 눈치를 채고 함께 화장실을 찾아주는 사람의 은혜들로 차오른다.


    화장실 주기가 짧다는 것은 여행에 상당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인가가 드문 곳을 한나절 내내 걸어야 할 때는 더 신경 쓰인다. 유년기의 불안증으로부터 시작된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화장실 강박증으로 발전한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전날 먹는 음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름의 전략을 갖는 지경에 이르렀다.


    숙소를 나서면서 마음속에는 휴지통 게이지를 하나 설정해 둔다. 휴지통이 서서히 차오르면 제때 비워주어야 한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기 전 일을 해결하고 나면 한 3시간쯤은 차분히 여행할 수 있다. 점심쯤 얼음을 가득 담은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또 한 번 비움의 타이밍이 찾아온다. 길을 걷기에 3시간이라는 용량은 너무나 작다. 이에 두 가지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계획을 확실히 세워두는 방법이다. 그날의 코스를 미리 알고 있을 때에는 거점 삼을 수 있는 기차역이나 음식점이 몰려있는 곳을 체크해 둔다. 3-5시간 주기로 그곳을 지날 수 있게끔 코스를 조금씩 수정한다. 그에 따라 그날의 식사 시간이 결정된다. 이를테면 화장실 거점에는 가급적 일찍 도착해서 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 남짓 시간을 보내며 배의 신호를 충분히 기다린다. 일을 보고 나면 다음 거점을 향해 출발한다. 

    두 번째 방법은 장내 숙변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꽤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걷기 코스가 예정되어 있다면 며칠 전부터는 커피를 하루 2잔 이하로 줄인다. 커피는 형태가 완성되지 않은 변을 미완성의 상태로 배출시킨다. 또한 이뇨작용으로 경미한 탈수 상태를 만들고 자꾸 수분을 섭취하게 만든다. 섭취된 수분의 일부는 대장으로 배설되니 배변 빈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수분 역시 요의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만 찔끔찔끔 보충하는 것이 좋다. 또한 배변 컨트롤의 화룡점정은 바로 식이섬유 섭취에 있다. 불용성 식이섬유는 장내 배변을 옹골차게 응축한다. 적당히 단단하게 마른 변의 가장 큰 장점은 불시에 튀어나가는 놈이 없다는 것이다. 변의는 지그시 찾아오고 몇 시간 정도는 충분히 참을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대장 내 수분을 빨아들여 섭취된 수분의 상당량을 대장에 저장해 둘 수가 있다. 한편 불의의 상황을 초래하는 튀김이나 기름진 음식은 피하고, 장 연동을 촉진하는 커피와 카페인 음료는 피한다. 물은 되도록 전해질 음료의 형태로 최소한으로만 공급한다. 결과적으로 배변 패턴의 편차는 최소화된다. 



    돌이켜보니 참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낯선 고속도로를 한창 달리고 있는 버스 안에서 신호를 감지하는 일보다는 수백 배 낫다. 폐쇄된 공간에서 급작스레 찾아오는 신호는 언제 겪어도 쉬이 적응이 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부처를 외쳐도 보고 지금 내 몸 안의 상황을 자극하지 않는 생각이 무얼까 골똘히 고민한다. 너무 신나지도 너무 슬프지도 않은 생각. 느긋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은 또 아니기에 창틀에 낀 먼지나 물 때 자국을 흐릿한 초점으로 바라보는 정도로 해결을 보곤 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는 일이 싫어 식단의 피곤함도 감수하게 되었다.

    신호가 온 상황일수록 차분하게 생각해야 한다. 서두름은 언제나 일을 그르친다. 어딘가에 다 와갈 때, 이제 화장실이 나타날 것만 같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두 개의 괄약근 중 하나는 자율신경계의 지배를 받아 의지대로 조절할 수가 없다. 생각을 서두르면 자율신경계는 마치 바로 앞에 변기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만에 하나 열린 줄 알았던 화장실이 수리 중이거나, 조금 더 멀리 있는 곳을 새롭게 탐색해야 한다면 남은 괄약근 하나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간신히 안정을 찾았던 고속도로 한복판에 있는 듯 겸손해야 한다. '내 앞에 변기가 나타나도 나는 천천히 가방을 벗어 가장 깨끗한 곳에 놓아둘 것이다.' 다짐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어릴 적 어느 목사님이 "화장실은 탈출구다."라며 설교하는 걸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정말이지 화장실은 카타르시스로 충만한 탈출구이다. 더불어 카타르시스의 부재는 몸과 마음을 극단적인 시험에 빠뜨린다. 화장실이 뜸한 나라에서는 자신의 장운동을 되돌아보게 되고 덩달아 스스로를 되돌아보기에 최적인 기회를 갖는다. 내 근육도 뼈도, 신경 작용의 부산물도 결국은 배설물이 되어 나온다. 문명이라는 거룩한 이름 뒤에 가려진 나는 어쩌면 좋지도 나쁘지도 더럽지도 않은, 그저 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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