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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앙 Oct 20. 2023

5. 붉은 땅과 붉은 사람들

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 줍기


    티벳 고원에서 발원한 메콩강과 그 지류들이 훑어가는 동남아의 땅은 붉은색이다. 흙의 빛깔이 붉어 땅을 갈아 살아가는 삶의 배경도 붉은색이다. 우리와 비슷한 농경지임에도 녹색 풀과 적색 땅의 조합은 마치 촬영 후 보정을 입힌 색조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비과학적인 발상이겠지만 토착민들의 낯빛은 결국 땅의 색깔을 닮아가는 것 같다. 우리네 시골 어르신들이 종국에는 황톳빛으로 곱게 그을은 얼굴을 갖는 것처럼, 이곳 토착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약간 상기된 듯한 붉은빛이 감돈다. 땅이 특정 비율로 갖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색소로 표현되었을 테고, 그 산물을 오래도록 섭취하고 마셔 온 영향일지 모른다. 물론 강한 자외선과 숨찬 노동의 거듭된 영향을 알리 없는 철없는 여행자의 생각이다.  



    인도차이나반도 토양의 붉은빛은 철분이 풍부한 현무암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한다. 신생대의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붉은 현무암이 오래도록 풍화를 겪으며 지금의 검붉은 흙을 구성하게 되었다. 미네랄이 풍부한 물로 인해 흙이 더욱 붉고 비옥해졌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화산에서 유래한 흙과 그걸 촉촉이 적셔주는 메콩강이 삼모작까지 가능한 붉은 땅을 만들었다. 

    반도의 주된 유적지인 크메르, 란나, 아유타야 등의 왕국이 흥성했던 시절도 지층의 입장에서는 매우 최근에 속한다. 사원에는 아주 오래전에 구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붉은 벽돌이 나뒹군다. 모든 유적이 당국의 보호를 받지는 못한 탓이다. 쉽사리 발에 차이는 돌덩이들을 보자니 500년, 1000년의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오늘 아침 지나온 밭둑의 색도 레드, 지은 지 500년이 지난 탑에 드러난 벽돌도 똑같은 레드이다.   


    사람들은 수십 대째 유사한 생활양식을 이어오고 있다. 건물에는 간혹 가게가 새로 입점하면서 가벽에 색을 입혔을 뿐, 뼈대를 구성하는 벽돌의 색은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벽돌을 채우는 흙은 똑같은 땅으로부터 구해졌다. 그러니 벽돌의 기원을 곰곰이 따져볼수록 사원은 그리 별나지 않은 일이 되고, 반면 현재 사람들의 생활 자체가 생생히 살아있는 역사로 보이기 시작한다. 

    여행객이 험지에서 마주하는 이들은 대개 땅에서 자란 과일과 곡물을 직접 재배하거나 판매하는 사람들이다. 땅을 그저 몇 평의 부동산쯤으로 배워 온 나와 달리, 직접 씨앗을 뿌리는 이들에게 땅은 생활을 이어나가는 직관적인 힘으로 여겨질 터이다. 그들의 눈빛은 먼 곳을 지긋하게 응시하는 늙은 삽살개의 것처럼 자신이 가꾸고 뛰놀았던 땅의 색을 담고 있다. 부드럽고 강하며, 정직하다. 


    척박한 땅에서 그들이 보이는 의연한 태도가 간혹 나의 결핍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나는 되돌아가야 할 도시에 대한 번뇌에 사로잡힌다. 땅과는 한참을 멀어진 나는 잡식과 잡념을 거듭하다가 못내 곯아떨어지곤 했다. 여행지에서는 떠나온 곳을 떠올리면 안 되는 법이지만 현지인을 우러르는 마음은 공연히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땅과 노동에 대한 자부심을 풍기는 사람들은 선한 눈매와 대조되는 굳건한 입매를 가졌다. 나처럼 도시의 긴장을 얼굴에 품은 사람에게는 승모근과 저작근이 발달한다. 어깨가 종일 뻐근하고 나이가 들수록 턱은 후덕해진다. 반면 종일 온몸으로 밭을 가는 사람은 승모근 대신 코어 근육이, 저작근 대신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 근육이 발달한다. 입꼬리 끝까지 야무지게 닫혀 있는 그들의 표정은 진지함과 함박웃음 사이에 있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역시나 인사 한 번에도 무장해제되어 방긋 웃어준다. "사바이디" 

    매일 땅의 힘을 느끼는 사람들은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다. 진지함과 웃음의 거리가 가깝다. 언제든 진지하고, 또 언제든 웃을 수 있지만 일희일비하지는 않는다. 그 건강한 표정들 앞에서 내 마음의 병폐는 양각으로 도드라진다. 좋다는 것으로만 끼워 맞춘 조립식 인격. 반도체와 합성수지 없이는 삶을 떠올릴 수 없는 지금 내 낯빛은 혼란한 모자이크 패턴이다. 어설프게나마 그을은 피부만큼이라도 그들의 마음을 닮고 싶어 한껏 살을 태운다. 


    내 자라온 곳에 흐르던 계곡물과 모래 먼지를 온통 뒤집어썼던 초등학교 운동장 바닥을 되새긴다. 손에 든 쌀과자 한 입을 베어 무니 문득 이 몸도 땅이 키워온 것이라는 단상이 스친다. 나는 화강암 지반의 검은 황토에서 자랐고, 지금도 깊은 계곡에는 소금쟁이와 도롱뇽이 산다. 땅을 일구는 사람들은 그들을 스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 깊은 계곡, 잊혔던 뇌 주름 어딘가의 고랑을 되찾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땅의 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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