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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앙 Oct 20. 2023

4. 걸음과 뱃살

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 줍기


    고작 치앙마이(Chiang Mai)에서 빠이(Pai)로 이동하는 세 시간의 여정에도 기력이 소진되어 버렸다. 멀미 때문이다. 앞자리에 앉은 유럽인 커플이 함께 영화도 보고 과자도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동안,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차를 세워달라고 말할까 말까 속으로 수십 번을 망설였다. 나는 차를 처음 타보는 강아지처럼 어색한 멀미를 애써 잠으로 달랬다. 그렇게 위 내 고여있던 위액과 음식물은 도착지에서 경유 매연 냄새를 맡자마자 뿜어져 나갔다. '그간 마음도 몸도 한 곳에 고여있던 터라 이동에 대한 면역력과 기동성이 많이 떨어졌구나.' 지난 몇 년간의 변화를 깨달았다. 

    걸음에 필요한 코어 근육은 힘 없이 무너져 있었고, 날벌레는 항상 귀찮거나 두려운 존재였고, 갑자기 내리는 스콜에도 쉽게 당황했다. 피로를 당연하게 여기며 기동하는 것이 여행이라면, 지금까지 나는 비행과 휴양, 그리고 쇼핑을 마치 여행의 전부로 여겼던 듯하다. 


    도시 하나를 옮겨갈 때마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몰려온다. 배낭을 지고 숙소를 나서면 다시 야생에 놓인 기분이 든다. 자외선은 도로에 늘어선 가게들의 처마 지붕을 이용해 요령껏 피해 걸어야 하고,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때는 갑자기 비가 내릴 것을 대비하여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땀에 전 가슴과 등덜미를 말리기 위해 중간중간 풀무질하듯 옷자락 속으로 바람을 넣어준다. 여행객의 이 자연스러운 보상적 행동을 내 것으로 여기는 데에는 열흘 이상의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마라톤에서는 초반의 무거움을 이겨내면 어느 시점을 지나 새삼 몸이 가벼워지고 활력이 차오르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이동하는 여행 중에도 러너스 하이가 찾아온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 몸뚱어리를 포기하게 된다. 땀이 흐르든 말든, 머리가 젖든 말든 어깨가 결리든 말든 발은 자동으로 나아간다. 여권과 지폐가 젖지 않도록 간단한 채비만 해두고 그냥 생각 없이 전방으로 열려있는 길을 걷는다. 사막을 뒷동산 넘듯 넘나든 생텍쥐페리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은, 지구가 허용한 유일한 마약인 '트레벨러스 하이(treveler's high)'가 샘솟는다. 


    불필요하게 짊어졌던 자아를 벗어던지는 데 이만한 것이 없다. 그저 걷고 이동하는 것. 익숙지 않은 교통수단과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인들과 가끔은 피할 수 없는 강아지들의 분변과 약간의 긴장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것들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계산되기 시작한다. 이제야 내가 가진 예산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을 제법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불쾌함은 두려움에서 기인한 감정임을 깨닫게 되고, 분노 역시 두려움의 발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미지의 내가 두려웠던 것이고, 언제거나 발끝으로 보이지 않는 땅을 두드리며 나아가듯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분노의 원인은 내가 스스로를 알지 못했던 탓이다. 스스로를 알지 못하니까 돈이든 직장이든 작업물이든 일단 성취시키는 데 급급했다. 남은 것은 넉넉한 감수성이 아닌 사건의 산물들 뿐이었고, 특별한 감회나 충족감 따위를 느낀 적은 없었다.


    이동으로 몸이 무거워진 어느 하루는 이른 낮잠을 청했다. 비몽사몽으로 한 시간쯤 지났을까 문득 하복부에서 출렁이는 지방이 잠결에도 거북하게 느껴졌다. 피하뿐만 아니라 복강에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좌우로 몸을 뒤척일 때마다 배 안 어딘가가 계속 꿀렁였으니까. 제 자리를 잊고 이곳저곳 피어오르는 기름 덩어리. 요놈이 몸의 기동을 방해하는 주범일지 모른다. 그동안 나는 몸 안의 범인이 커지는 줄도 모르고 `1일 1식'이랍시고 마음 놓고 과식을 했다. 일하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자기 연민은 맥주와 야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뱃살은 그동안 스스로를 챙기지 못했다는 과오들의 적체물인 셈이다.

    뱃살이 그간의 생활에 방해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딱 뱃살만큼만 생활해 왔다는 반증이다. 뱃살이 '복부 인격'이라는 둥의 말장난도 결국은 오류다. 현대의 바쁜 일상은 술과 스트레스가 불가피했고, 그것이 체내 지방을 재분배하여 지방간이나 내장지방 등의 성인병을 만들었다는 게 현재 도시의 정론이다. 그렇다고 내장지방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바쁜 일상이었더라도 사람 관계와 몸에 작용하는 무질서도를 어떻게든 인간 본래의 생명성으로 상쇄하려 노력했다면 뱃살은 결코 생길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이 몸에 대한 옹호론이 최근 들어서는 되려 스스로를 옥죄는 방향으로 제안되고 있다. 요가, 필라테스, 퍼스널 트레이닝, 바디 프로필, 젊은 핏과 감각을 극히 일부가 산정하는 문화. 악마는 언제나 천사와 유사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보여주기식의 몸매 관리는 결국 또 자신의 감각을 잃게 만든다. 근육의 신전과 고유감각을 온전히 느끼며 운동하는 것과 보여주기 위해 강화하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이다. 

    흉측한 뱃살을 마냥 감추려 하는 것은 보여주기식 운동이다. 반면 생활에 지장을 주어 자연스레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스스로를 긍정하는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운동은 후자의 것이 되어야 사회적 부작용이 가장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걷는 동안 팬티의 밴드가 말려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코어 근육의 강화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뱃살을 빼고 싶어졌다. 사냥 또는 경작을 하던 시절의 인류가 가졌을 딱 그만큼만 남겨두고서.


    도시를 옮겨 다니는 일은 점점 힘에 부치지만 일상이든 여행이든 스스로를 온전히 느끼며 나아가는 것 외에 애초에 다른 옵션은 없다. 감각은 기동을 원하고 기동은 감각을 수반하므로 둘은 한 몸이다. 일상을 풍부하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다른 곳을 경험하고 싶어 할 것이고, 타지를 이동하며 생경함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일상의 감각을 활성화할 수 있다. 그러니 최근 몇 년 동안의 나는 둘 모두를 잃었던 것이다. 기동하지 않으니 감각이 둔해지고 둔한 감각이 동기를 떨어뜨려 기동을 막아 세웠다. 집 밖을 나가도 딱히 재밌는 게 없었다. 인간은 정해진 형태가 없이 흘러가는 존재라는 주장이 맞다면 감각을 자결해 버린 내 의식은 단단히 병들어 있었다. 

    물처럼 정해진 형태가 없는 것이라면 때로는 늪지대에 갇힌 수분처럼, 때로는 유속이 빠른 강물처럼 요구되는 상황에 맞추어 흘러가는 것이 인간이다. 다만 변화를 두려워하는 뱃살이 감각과 기동의 순환을 가로막는다. 어쨌든 나의 본질은 둘 사이의 균형을 놓치지 않는 것이고, 지금 내 앞에는 가야 할 길과 느껴야 할 일이 동시에 놓여있다. 그 사실을 구태여 인지할 필요도 없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기만 하면 발은 자연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느끼거나 움직이거나.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쓸데없는 고민이 피어오를 때마다 걸음은 언제나 건강한 시작점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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