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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앙 Oct 18. 2023

3. 모카포트

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 줍기


    "슈르르륵"


    그라인더에 원두를 쏟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곧 마시게 될 커피가 갈리기 직전, 시간이 멈칫하듯 괜히 숨을 참게 된다. 이윽고 시작된 '위이잉' 소리가 한소끔 지나가면 그윽한 향이 전해온다. 기름기 가득한 원두 가루를 모카포트의 원두 챔버에 담는다. 원두 가루를 가능한 한 수북이, 한 알갱이도 남지 않게 모두 털어 넣는다. 그 와중에 원두 가루는 한 곳에 몰리지 않고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정교한 스킬이 필요하지만 반자동 에스프레소 기계와 달리 특별한 장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손의 감각만으로 원두를 고르게 펼친다. 여기서 주인장의 손맛과 실력이 발휘된다.

    모카포트를 오래 다뤄온 주인장은 원두 챔버에 고르고 옹골차게 커피를 담아낸다. 뚜껑을 단단히 체결하면 비로소 진한 커피를 추출하기에 적합한 하나의 '포트'가 완성된다.


    이제 2분여의 시간 동안 뜨거운 가스불로 포트를 달군다. 원두 챔버 아래층의 물이 끓으면서 기포와 증기, 김이 물의 부피를 폭발시킨다. 좁은 공간으로부터 미어터진 물 분자는 원두 챔버 쪽으로 상승하기 시작한다. 티격태격하던 물의 입자들이 위층의 원두 챔버를 적시고 나면 시커먼 커피가 추출되기 시작한다. 보글보글 소리가 나면 가스불을 살짝 줄이고, 소리가 사라진 어느 시점에서는 아주 꺼버려야 한다. 연갈색의 크레마가 군데군데 보인다면 추출을 잘 마친 것이다. 차갑게 먹고 싶다면 얼음 물을, 뜨겁게 마신다면 따뜻한 물을 잔에 담아 미리 준비해두어야 한다. 이제 크레마가 뜨거운 포트 벽에 닿아 졸아들지 않도록 까만 액체를 잘 구슬려 조심스레 커피잔에 옮겨 담는다.

    잘 내리고 잘 옮겨 담은 커피에서는 진한 달고나 향이 난다. 적당히 식힌 뒤 한 모금을 음미한다. 커피는 첫 모금이 가장 강렬하고 풍부하다. 혓바닥과 입천장을 거쳐 한 무리의 액체가 삼켜지고, 잔여의 고형물들은 혀뿌리와 인두 부근에 붙어 후향(aftertaste)을 자아낸다. 모카 커피 추출 방식은 바로 이 후향에 강점이 있다. 씁쓸하면서도 끈끈한 단맛이 어우러져 숨을 내쉴 때마다 커피 향을 되새김하도록 만든다.


    풍부하고 진한 맛과는 대조적으로 모카 포트 커피는 많은 채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스통과 버너, 모카포트와 컵, 그라인더와 원두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인지 더운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단출한 구성의 '모카 포트 커피집'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좌판에 가스통만 갖춰도 한나절 장사를 할 수 있다. 비가 오면 잠시 비닐로 씌워 두었다가 하늘이 개면 장사를 재개한다.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라는 우스개의 환상이 나에게도 있다. '튼튼한 신발과 배낭만 가지고 어디서든 잠을 청할 수 있는' 담력과 생존력을 선망해 왔다. 홀연한 여행과 가뿐한 움직임을 위해서는 짐 채비가 최소한으로 줄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내 환상이 모카 포트 포차에 투사되어 보이는 것이다. 삼발이 오토바이 한 편에 테이블을 꾸리고 커피 장사를 하는 일이 녹록하겠냐마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리는 그들의 하루를 통해 잠시 즐거운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두의 씁쓸한 맛까지 모조리 우려낸 모카포트 커피로부터 삶을 유지해 나가는 우리의 하루를 연상한다. 마냥 달달하지도, 마냥 못 먹도록 쓰거나 시큼하지도 않다. 쾌와 불쾌의 맛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한 데 어우러져 서로 다른 '앞 맛'과 '끝 맛'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커피 맛과 비슷할지 모른다. 무채색과 원색을 모두 가진 오색실 뭉치처럼 하얀 여행지에도, 검게 무기력한 하루에도, 붉게 타오르는 작업 현장에도 모두 어울리는 맛이다.

    마음이 아픈 날에 마신 커피는 쓰다. 쾌청한 날 여유롭게 마신 커피는 달다. 한 가지 마음에도 여러 가지 구석이 있는 법인데, 검은 단색의 커피라고 한 가지 맛에 그칠까.

    모카 포트는 커피의 쓰디쓴 맛을 굳이 거르지 않고 투과한다. 하루의 쓴맛에서 오묘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려는 상징과 같이 느껴진다. 더군다나 단출한 가게에서 내려 준 쓴맛의 커피는 그 오묘한 상징성을 부각한다.


    한때 전 세계의 스타벅스에서 반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을 전자동으로 교체한 이후, 커피 추출 방식에도 기계화 바람이 불었었다. 그 깔끔하게 설계된 맛은 사람들을 매료했지만 마음에는 언제나 양극단이 동시에 존재한다. 깔끔한 맛에 익숙해질수록 한편으로는 혓바닥을 거칠게 자극하는 맛을 더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거친 쓴맛은 도심에서 자연으로, 계획에서 무계획으로, 구속에서 자유로 가려는 마음과 대응한다. 고작 한 잔의 커피만으로도 자유를 향한 설렘이 이토록 자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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