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 줍기
도파민은 우리가 돈을 계속 벌게 해 주고, 공부를 지속하게 해주는 동기부여 호르몬이다. 성취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 지금, 사람들은 삶과 성취의 균형을 위해 도파민의 효율적인 사용법을 익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일에서 도파민 보상을 받아 즐겁게 임하기, 덩달아 오른 능률로 빠른 승진을 거듭하기, 안정적인 생계 수단을 확보하기. 나아가 마음속에 충만해진 행복감을 오래도록 누리기. 도파민형 인간이라는 신조어가 그런 우리들의 희망을 대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커피 몇 잔과 더불어 매일의 성취 리스트를 지우는 맛으로 하루를 버티곤 한다.
나는 여행지의 행복감 역시 적절히 분배된 도파민의 작용에서 오는 것이리라 믿게 되었다. 그저 몇 mg의 호르몬에 그날 하루의 기분이 좌우되는, 지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영적으로 거룩한 생명체인 동시에 포유류로서 단순한 생물 화학적 섭리에 지배받는다는 사실은 일면 다행이기도 하다. 우울증이 우려되는 경우에는 세로토닌 작용을 하는 호르몬약을 복용하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담하게 일상을 지속할 수 있다. 하루 100g 이상의 단백질을 챙겨 먹으며 운동하면 금세 근육이 붙는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한 아이들은 현저히 튼튼한 골격을 갖게 된다.
사는 일이 어느 정도는 자연의 프로토콜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큰 위안이다. 이젠 허리가 쑤시면 디스크가 터지기 전에 예방적인 스쿼트와 요가를 시도할 수 있다. 마음이 우울할 땐 명상이나 요가 센터를 찾으면 된다. 아이의 고유감각과 지능을 발달시키고 싶다면 놀이와 여행을 통해 여러 가지 감각에 노출시키면 된다. 기계론적 세계관과 영적인 세계관을 나누기에 앞서 중력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면 과학이 가져다준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만 정치 경제적인 배경과 권력, 지배와 수탈 등이 더해져 인간 본래의 자유의지와 현명함을 흐리고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는 분명 스스로의 마음을 반추하고 가꿀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도박에서 주어지는 도파민 보상의 정도는 '보상의 크기가 아닌 보상이 주어지는 방식'에 있다고 한다.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도박꾼에게는 자신의 방식으로 결과를 예측하고 그것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에 엄청난 황홀감과 성취감이 잭팟처럼 터지는 것이다. 단, 게임 10판마다 반드시 한 번은 잭팟이 터진다거나 잭팟의 크기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도파민을 유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루를 일해 일당을 버는 일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도파민과 성취감, 동기부여는 보상의 확률과 정도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즉 '새로움'에서 온다. 우리를 매료하는 것은 보상의 크기가 아닌 보상의 '가변성'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상자 안에 든 선물 자체보다는 그 선물이 도대체 무엇인지 기대할 때 더 큰 보상을 얻는다.
새로움을 느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새로움을 구매하는 방법과, 자칫 같아 보일 수 있는 것 틈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방법. 전자가 쇼핑의 즐거움이라면 후자는 관찰의 즐거움이다. 쇼핑으로 기발하고 새로운 상품을 찾아 구매하는 것도 보상의 한 형태이지만 수개월 이상 지속하기는 어렵다. 결국 장기간의 행복을 위해 갖춰야 하는 것은 같아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새로움을 관찰하려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오늘 내리쬐는 햇볕은 어제와 다른 것이고, 땅에서 자라난 과실도 매번 같은 모양은 아닐 것이다. 쇼핑과 도박을 하지 않고도 건질 수 있는 가변적인 보상은 우리 주변 곳곳에 놓여있다.
나는 한동안 신체를 자주 활용하지 못했고, 앉은 자세로 갖은 디지털 자극에만 반응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너무 많은 자극과 도파민의 고갈에 황폐해진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음악에 감응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무의미한 전자파에 에워싸였고 나는 그 속에서 허우적댔다. 내 눈은 도박꾼의 것처럼 퀭해져 있었다. 그 환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선택한 것이 매일 아침의 짧은 명상이다.
나의 몸과 주변의 현상을 깊게 응시하고 그곳에서 날마다 다른 새로움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고요해지는 것뿐이었다. 고요한 마음은 굳이 도파민의 잭팟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걸음을 옮기는 발바닥의 감각에서도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마음만 고요해질 수 있다면, 한 겨울의 추위를 한 여름의 냉방으로 나눠 쓰는 상상처럼 일상의 기쁨을 천천히 오래 누릴 수 있다.
설탕에 절어버린 마음은 여행지에서조차 정제된 자본의 과당처럼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만을 원한다. 정제된 글루텐 덩어리인 빵으로 모자라, 그 위에 슈가 파우더를 뿌린다. 이제는 그 위에 연유를 뿌리지 않으면 쉽게 감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방식으로는 여행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적절한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일상에 도파민 농도를 낮고 꾸준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과학적 사실이다. 걷기와 같은 고유감각 운동을 통해 세로토닌 분비를 자극한다면 평온한 행복감을 어느 정도 확보해 둘 수도 있다. 명상은 전두엽을 자극해 두려움과 긴장감은 늦추고 지각력은 높인다. 한편으로는 도파민 과분비를 막아 범람하여 폭발하는 흥분감 대신, 언제나 가늘게 흐르는 실개천의 고요한 행복감을 되찾아 준다. 즉 눈앞에 있는 작은 변화를 알아채고 그 변화를 바라보는 일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준다.
여행 중에도 행복 호르몬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지속되어야 했다. 문득 눈을 뜬 어느 날 그 이국적인 광경이 전혀 낯설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이 나는 가장 두렵다. 그것은 어리석은 과식이 초래한 부담스러운 포만감이며, 하루 종일 디지털 미디어에 속아 그 자리에서 하루를 허비한 자의 하릴없는 자책과도 같다. 새로움으로 충만해야 할 여행지에서조차 무뎌졌다는 사실은 삶 전체의 권태와 감각의 노화를 암시한다. 더 이상 그 새로운 문화와 먹거리와 사람들이 감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여행은 빛나는 순간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여행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행 중의 평정심 유지와 도파민의 적절한 분배는 여행뿐만 아니라 삶 전부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온전한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 온전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먼저 아픈 곳 없는 건강한 몸이 필수이다. 평소 몸에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면 해결한 뒤 여행에 떠나는 편이 낫겠고, 불가능하다면 여행지에서는 몸의 건강을 최선으로 추구해야 한다. 숙면도 결정적인 요소이다. 기분 좋게 숙면을 마친 아침에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는데 이 마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고요한 행복과 가장 유사한 마음이다. 아침의 평정심을 하루 종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바른 자세로 명상을 취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정리하자면 건강과 숙면, 그리고 명상이 부드러운 각성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고요한 마음으로 바라본 풍경에는 문화 간의 차이가 그윽하게 배어 나온다. 사람들의 옷차림과 걸음걸이, 기온과 습도 차이가 만들어 낸 식생과 먹거리가 새삼 신기하게 여겨진다. 때로 바람에 살랑이는 야자수의 움직임에 마음이 홀릴 수도, 처음 듣는 새의 울음을 신난 듯 따라 해 볼 수도 있다. 건강한 마음과 짧은 명상이 여행지의 숨결을 더욱 섬세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알랭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냥 집에 눌러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 항공 비행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이렇게 들린다. "집에 앉아서도 여행할 수 있어야 비로소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또한, 여행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야 다시금 새로운 일상을 시작할 수 있다." 여행은 권태를 해소해 준다기보다, 오히려 그간 권태의 당위로서 둘러대던 핑계를 무력화함으로써 마음의 변화를 촉구한다. 핑계가 사라졌으니 여행을 계기로 마음을 고쳐먹게 된다.
결국 싱그러운 아침을 맞이하는 일은 이국적인 환경이 아닌 마음가짐에 달렸다. 어디서든 새롭게 존재할 수 있다면 귀를 스치는 음악에도 마음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스치는 사람들이 새삼 감사한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나에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