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 줍기
할머니는 많은 일들을 시장에서 해결했다. 들에 있는 채소를 꺾어 어지간한 양이 찰 때마다 말씀하셨다. "내일 시장에 내다 팔아야지." 어떤 날은 시장에서 채소와 바꿔 온 쑥떡을 넌지시 건네주셨다. 그 시절 여인들의 한나절 놀이 코스였는지 당시 신작로 주변으로 형성된 시장을 구석구석 돌아다닌 추억도 이야기하시곤 했다. 어떤 날은 시장에서 구한 천으로 보슬보슬한 잠옷을 만들어주셨다. 쇄골에 스치지 않을 만치 목이 깊게 파인 잠옷은 유년기 내내 가장 편안한 생활복이었다.
어린 날의 시장은 원한다면 무엇이든 뚝딱 해결해 주는 마법의 공간이기도 했다. 철물점, 방앗간부터 밑반찬과 장난감까지 거의 모든 필요를 그곳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어머니도 시장을 한창 애용하던 때가 있었다. 운동회 전날 낡은 운동화를 창피해하던 아들을 위해 찾았던 곳도 시장, 외출 후 돌아오는 길에 삼 남매 먹일 간식을 사 오시던 곳도 시장이었다.
한때 대형마트 물가가 시장보다 저렴해진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주거인구가 많은 지역을 기반으로 다시 저렴한 가격대를 회복한 시장이 하나 둘 눈에 뜨이곤 한다. 요즘도 나는 김치나 젓갈류가 부족할 때면 마트보다는 시장을 찾는다. 시장은 여전히 정겹고 요긴한 도움을 주는 곳으로 남아있다.
나에게 시장이 생활에 밀접한 추억이 어려있는 장소인 만큼, 다른 동네 다른 도시의 시장 역시 그들만의 내밀한 특색을 드러낸다. 그러니 이색을 추구하는 여행자들에게 시장은 무척 매력적인 곳으로 다가온다. 일단 새로운 도시에 다다라 숙소를 해결하고 나면, 끼니를 해결할 겸 시장을 찾는 게 '국룰'이다.
가장 진솔한 사람들과 계산대 너머로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의 표정과 제스처를 통해 도시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전해온다. 경험적으로 상인들의 표정과 말투가 대체로 쌀쌀맞을 때면 향후 그 도시에서의 생활이 팍팍하게 느껴졌던 적이 많았다. 반면 상인들과 온정 어린 시선을 나눌 수 있는 곳에서는 고향에 간 듯 편안히 유유자적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은 도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살필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시장 한복판에서 말도 할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의 모습으로 눈 코 입을 벌렁거린다. 제일 설레는 시간이다.
시장의 좁은 통로를 줄지어 통과하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아이를 입힐 꼬까옷이 필요한 사람, 배우자의 부탁으로 찬 거리를 알뜰히 골라야 하는 사람, 관광차 들러 알짜배기로 식사를 해결하려는 사람. 뭐니 뭐니 해도 시장 구경의 진미는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고르는 현지 이용객과 소박한 상인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다.
인도를 비롯한 남부 아시아에는 밥을 손으로 집어먹는 문화가 잔존해 있다. 특히 인도차이나반도 사람들은 찹쌀밥을 손으로 뜯어 반찬과 함께 먹으며 한 끼니를 해결한다. 그들은 밥과 반찬을 직접 해 먹기보다 대부분 집 밖에서 요깃거리를 구한다. 식구가 많거나 장사를 하는 가정에서는 숯불과 대나무 통을 이용해 밥을 쪄 먹기도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시장과 노점에서 밥과 반찬을 구매한다. 시장이 먼 작은 도시일지라도 어디든 노점이 즐비한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그곳이 시장의 기능을 대체하거나 점차 규모가 커져 어엿한 시장이 되는 경우도 있다.
위도가 낮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시장이 열린다. 지열이 사람을 괴롭히는 정오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조금 일찍 시작한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필요한 아침 식사 거리와 싼프라품(실내에 작게 마련한 신당)에 올릴 꽃들을 시장에서 구한다. 당장 출근을 앞둔 사람들은 시장 내 좁은 동선을 능숙하게 이동하며 밥과 간식을 챙긴 뒤 유유히 떠난다. 시장 상인들 역시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아침을 해결한다. 비닐봉지에 든 밥을 한 움큼 집어 뭉쳐둔 다음, 한 무리의 손님들이 지나갈 때마다 한 입씩 작게 떼어먹는다.
아침 시장에서는 주로 밥과 죽을 팔지만 오후 5시가 넘어가는 저녁 시장부터는 볶음 국수와 팟타이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매대에는 고추기름에 볶은 면이 두께 별로 한 쟁반씩 나열되어 있다. 고무줄보다 가는 면은 '쎈미', 그보다 조금 두꺼운 것은 '쎈렉', 칼국수 면보다 두꺼운 것은 '쎈야이'라고 부른다. 시장 행상에게는 식당과 달리 별도의 조리도구를 갖추지 못한 곳이 많다. 그들은 대개 조리가 완료된 음식을 판매한다. 쟁반에는 불그스름하게 물든 면발이 소복이 쌓여있다. 장이 열리기 시작할 즈음 매대를 채비하는 사장님의 얼굴은 조리의 열기 때문인지 조금은 붉어져 있다. 아마도 사장님은 한낮의 무더위를 참으면서 한사코 불과 싸웠을 것이다. 그렇게 볶인 면들이 쟁반에 탐스럽게 쌓여 그의 상기된 표정과 함께 놓여있게 된 것이리라.
굵은 면과 가는 면을 한 종류씩 주문했다. 소정의 지폐를 건네면 고소한 면발이 한 움큼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 쥘 수 있다. 사장님은 불과 싸우는 동안 나와 같은 손님을 떠올렸을 것이고, 나도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서 이와 같이 정직한 상거래를 상상했다. 똑같은 제품에도 유통과 광고 마진, 수수료 등 갖가지 부가가치를 붙이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세상에서 이토록 담박한 시장이 남아 있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진다.
도시는 저마다 의도된 이미지들을 앞세워 대내외적인 홍보를 한다. 고층의 아파트먼트를 올리고 있는 공사현장, 정책 광고용 전광판, 로터리 혹은 사거리로 널찍이 교차하는 아스팔트 도로, 보호구를 착용하고 첨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냉전 이후 전 세계가 추구하는 이러한 일변도식의 이미지들로부터 인상 깊은 차이점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이미지 따위는 우리 집에도 넘쳐난다.
오히려 시장 사람들이나 골목길 사이를 뛰노는 아이들을 통해 얻는 이미지가 도시의 진짜 얼굴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의 표정은 물론, 기쁨과 분노의 포인트마저 이국적이다. 주식과 반찬거리, 밥 먹는 시간대, 모여 앉은 식구들의 분위기 등 모든 것이 새롭다. 그런 사람들의 실상을 한 데 아우른 곳이 바로 시장이기도 하다. 도시가 내세우는 몇 가지 관광코스를 제외한다면 시장은 여행지의 핵심 요약본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시장은 물건에 붙은 마진을 한 꺼풀 벗겨냄과 동시에 생활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여행 역시 불필요한 자아를 벗겨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시장과 여행은 성격마저 비슷한 찰떡궁합이다. 여행에서 시장을 보고, 시장을 통해 다시 여행을 꿈꾸는 과정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것 같다. 작은 구조가 반복되며 동일한 큰 구조를 이루는 프랙탈 속을 들여다보듯, 시장이라는 작은 단위 안에는 여행 전체를 아우르는 요소들이 흥미롭고 빼곡하게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