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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앙 Oct 21. 2023

7. 개의 입장

어느 내향인의 주섬주섬 여행 줍기


    시골의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은 보통 인구 밀집 구역과 거리를 두고 있다. 동트기 전의 새벽이나 밤늦게 하차한 날에는 도심까지 인적이 드문 길을 애써 걸어가야 한다. 치안이 좋은 나라에서는 야간 보행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불현듯 떼로 나타나 행인을 위협하는 강아지들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개는 시선을 공격적인 의도로 받아들인다. 한낮에 마주친 개 한 마리는 짧은 시선 교환으로도 쉽게 제압되지만, 오밤중 무리 지어 다니는 개들은 홀로 걷는 부랑자를 딱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외지인을 일대다로 대면한 개들은 기세가 등등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멀찍이 개가 마주 오고 있다면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줄곧 딴청을 부려야 한다. 귀여운 나머지 그의 얼굴을 살피려는 순간 얄궂게 짖으며 쫓아오는 개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개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라도 하는 듯 보행자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자신의 영역을 떠나가면 다시 제 할 일을 한다. 그렇게 강아지들의 감시 영역을 통과하다 보면 각각의 구획을 진지하게 나눠가진 강아지들의 습성이 못내 귀엽게 느껴진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순 없다. 그들 앞에서 나는 손을 자연스럽게 반동하며 하품을 하거나 먼 곳을 본다. '나쁜 사람 아니니, 지나가게 해 주라.' 속으로 말을 건넨다. 다행히도 뒤에서 덮치는 비겁한 개는 아직 보지 못했다.


    불교 국가에서는 개를 내세에 사람으로 태어날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문화 차이 때문인지 이곳 사람들은 대체로 개를 '귀여운 포유동물'쯤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저 강아지 봐 엄청 귀여워. 우이이이-"와 같은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낸 말도 좀처럼 듣기 어렵다. 대신 지나다 마주치는 동네 주민처럼 자연스럽게 개를 대한다. 어쩌다 동선이 겹치면 서로를 한 번씩 쳐다보거나, 잠시 같은 곳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몇 번 쓰다듬어주는 정도이다. 개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필요할 때만 사람을 찾고 쉽게 아양을 떨지 않는다.

    영역 동물인 개는 마치 고양이처럼 특정 골목 언저리를 자기 것으로 삼아 머무른다. 그러다 사람과 눈이 맞으면 고양이가 집사를 간택하듯 그 집의 양자로 들어간다. 그때부터는 목걸이를 두르고 "떠돌이 개가 아니에요."라는 표식을 얻는다. 동네에는 목걸이가 있는 개와 없는 개, 그리고 사람이 한 데 섞여 비슷한 속도로 거닌다.



    시골집에 머무는 개들은 영역을 순찰하거나 무리 지어 동네 마실을 다니는 등 야생적인 습성도 잃지 않는다. 안정적인 사료의 공급과 야생성, 두 마리 토끼를 얻은 대신 몇 가지는 잃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대부분의 개들은 피부 기생충에 시달리며 평생 국소적인 탈모증과 간지러움증을 앓는다. 심장사상충 구제와 중성화 수술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아 아마도 평균 수명은 7년 안쪽일 것이다. 그렇다고 구충제를 추천하거나 발라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이곳 문화와 자연에 대한 월권이 될 것만 같다.

    그들에게 드는 연민의 감정은 어쩔 수 없지만 어엿한 자연의 법칙 앞에 일말의 감정을 섞으려 드는 게 옳은 일인가 싶기도 하다. 야생 코끼리조차 병들어 무리에서의 이탈이 잦아지면 갯과 동물들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개를 대하는 이곳 사람들의 태도를 편협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그들은 개의 개체수를 의도적으로 늘리지 않고, 자신의 골목 앞을 배회하는 개에게는 최소한의 선의를 베푼다. 오는 개 마다하지 않고 가는 개는 보내준다. 자연의 섭리에는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한다. 도리어 한 생태를 이룬 개의 군집에서 귀여운 아이만 콕 집어 품종화하는 일이 기행인 것처럼 느껴진다.  


    도시에서 내가 대하는 개들은 보호자가 끼고도는, 껴앉아 마지않는 아이들이다. 그들을 대할 때 내 얼굴에 솟았던 자본주의적 미소, 세련된 척 기술을 구사하던 가증한 일들이 스쳐간다. 그 아이들과 이곳 개들은 전혀 다른 존재일까,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왜 달라지는 걸까 의문이 든다. 지금껏 강아지를 대하는 이상적이며 윤리적인 하나의 잣대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곳에서 개와 사람이 어우러진 또 하나의 생태를 마주하니 그 믿음도 허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생명 윤리도 마치 종교처럼 저마다의 것들이 진리인 듯 떠들지만 결국 흡수와 진화를 반복하며 꾸준히 변화하고 있다. 그 앞에서 나는 몇 가지 편협한 윤리관을 장착한 채 그저 한 70년 살다 가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둘 중 무엇이 더 옳을까. '귀여운 개를 브리딩하고 강아지가 태어나면 꼬박꼬박 기초 백신을 권장하는, 그러나 그 상당한 비율이 다시 버려지는 나라.' 아니면 '백신 접종도 중성화도 하지 않은 개들이 짧은 생애를 누리다 가게 두는, 그러나 브리딩도 하지 않는 나라.' 쉽게 답이 서지 않는다.


    언어의 사용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규칙을 합의하며 일련의 문법을 만들어왔다. 그 과정 중 많은 문자와 단어, 법칙이 사양되었다. 지금의 애견 윤리도 합당한 기준을 세우며 많은 개들을 희생시키는 과정 중에 있는지 모른다. 개를 위한 인류의 합의안 도출이 유야무야 미뤄지는 동안 개들이 하염없이 희생될 뿐이다.   

    생각해 보니 이곳 동네를 지키는 개들에게 한 대쯤 물려도 전혀 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나는 시장 창출이라는 미명 아래 개에 대한 인위적 개입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더욱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는 쪽은 개가 아닌 내 쪽에 가깝다. 개들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개를 치료한답시고 설치는 나보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두는 이곳 사람들의 선택이 더 반가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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