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를 지나, 코로나를 넘어
2월 말 코로나에 대한 우려가 조금씩 들려올 때쯤, 학교 개학이 연기된다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했던 일이 정말 현실이 되어버린 이후에도 곧 다시 개학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고, 일상으로 복귀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2주간의 개학 연기는 조금씩 더 연장되었고, 결국 3월을 집어삼켰다.
이내 벚꽃 피는 4월을 뛰어넘고, 가정의 달을 건너 5월이 다 끝나가는 오늘까지도 학교와 일상은 엉망이다.
부분적으로 일부 학년들이 등교를 시작했지만, 등교 이후의 풍경도 역시 낯설기만 하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지내야 하는 교실, 책상 위 칸막이, 어울려 먹을 수 없는 점심시간. 모든 것이 낯설기만한 풍경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딱하다.
한동안 매주 월요일이 되면 교육부의 개학 연기 발표가 나는 것을 온 국민이 기다렸다.
개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사일정에 대한 계획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개학 일정에 대한 정부 발표가 더 이상 기다려지지도, 궁금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저 그러려니.
이제는 학교가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뉴노멀이라고 불리는 비정상의 정상화는 교육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교육에 대한 정부 방침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일정의 리트머스지 같아서, 실험적인 시도들의 테스트 성격을 지니는 듯 하다. 동시에 다른 사회적 거리두기 등 코로나 이후의 경색된 사회 분위기의 온도조절기 같은 역할을 해왔다. 새롭게 코로나 확산 사태가 불거지면 학교 개학은 또 연기되고, 반대로 학교 개학 소식이 들려오면 사회적 거리두기도 그만큼 완화되는 등 학교 개학, 교육 문제는 우리 사회가 코로나를 대하고 있는 태도와 거리감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듯하다.
언제 끝나려나. 한참을 기다렸다. 한 주씩 애태우다가, 한 달씩도 기꺼이 기다릴 인내심이 생겨버렸다.
'애프터 코로나'라는 말을 들으면, 달라질 우리 사회의 모습들에 대한 전문가들의 예측들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동시에 '애프터'라는 말 속에서 이 지긋지긋한 비정상적 상황이 마치 끝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던져주는 듯 하다. 그래서 애프터라는 말을 들으면 계속 기다려진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신천지 사태, 유학생 사태, 그리고 이태원 사태를 지나 기다림도 지쳐갔다. 어느새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이제는 무력감으로 젖어드는 단계가 되니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어디서 감염되었는지 정확히 찾아내기도 힘든 확진자들의 잦은 출현으로 얼룩진 우리 일상은 마치 홍수 때 휩쓸려간 지뢰가 아무렇게나 진흙 속에 파묻힌 동네를 살아가야 하는 피난민들처럼 순진한 기다림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을 난도질 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에 달라질 것들에 대한 다양한 전망들이 뉴스 기사와 유튜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요즘, 문득 '애프터 코로나'라는 말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며 반문하게 되었다.
코로나 이후 달라질 것들을 예측하며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요즘, 어쩌면 코로나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실망감 역시 커지고 있는 듯다. 무엇보다 이리저리 상황에 이끌리고 정부 발표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스마트폰을 울려대는 경보 알람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 속에서 '애프터 코로나'는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실망감만을 키워주고 있는 듯하다. 아니 이제는 실망감이 아니라 무력감으로 바뀌고 있는 듯 하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언제 해가 동쪽으로 뜰 것인지를 바라다보고 있는 사람의 관점이 1차원적인 '애프터 코로나'의 관점 이라면, 마치 새가 하늘을 날며 땅 위의 먹잇감을 찾아 내려다보듯 바라보는 2차원 조감도의 관점이 '비욘드 코로나'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능력과 관점에 따라 N차는 점점 더 확대될 수도 있겠다.
일전에 이어령 교수님이 인터뷰에서 AI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다.
왜 사람이 말과 경주하려 하는가? 사람은 말과 뛰는 게 아니라 말 위에 타는 존재다.
AI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겠냐는 질문에 오히려 관점을 바꿔 답해주셨다. 이런 시각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듯 하다. 코로나가 끝나가기를 기다리거나 코로나가 우리 일상을 어떻게 바꿔 놓을 것인지 예상하는 것보다는 코로나 자체를 2차원, 3차원의 관점에서 내려다보고, 돌려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현실로 돌아와, 코로나가 얼른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날짜만 헤아리던 입장에서 이제는 코로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것을 멀리서 조망해볼 수 있는 관점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코로나에 지친 일상의 피로감과 실망감이 어느 순간, 코로나를 넘어서고 싶다는 열망으로 바뀐 것일 수도 있고, 일종의 오기가 발동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역경은 한 번도 우리를 피해 간 적이 없지 않나?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이겨냈을 뿐이지. 라는 다소 상투적인 문장을 떠올리며 코로나를 이기겠다는 오기가 발동된 순간이 바로 말 위에 올라타는 순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상은 여전히 마스크와 손소독제로 가득하고, 개학 한 학교에서의 하루하루가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와 그 주변 시민들에게 개학이란 곧 엄청난 불확실성이며, 통제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여겨지고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봐야 하지 않겠나. 그렇기에 다시 고민해 보게 된다.
무엇이 과연 내 현실에서 "비욘드 코로나"가 될 것인가? 또 어떻게 나는 "비욘드 코로나"의 관점을 가져보야 할 것인가.
가라야 다케히코라는 작가가 쓴 "생각 전개의 기술:겹눈 사고법"이라는 책이 있다.
겹눈 사고법이란 상식을 벗어나 다양한 시각으로 주어진 대상을 생각해 보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겹눈 사고야 말로 애프터 코로나라는 1차원적 사고를 2차원, 3차원의 입체적 구조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념을 벗어나는 것. 선입견을 버리는 것. 당연하다고 여겨 온 전제를 부정하거나 의심해 보는 것.
그 모든 것이 '뉴노멀', 곧 코로나 이후 달라진 것들이자, 코로나가 우리 삶에 가져온 변화를 높이에서 조망하는 방식일 것이다. 더 이상 끌려다니기 싫다면 상황을 이끌고 가면 될 일이다.
교육에 관해서도 그렇다. 1차원적 사고, 홑눈 사고 방식 만으로는 그저 개학 날짜만 헤아리거나 확진자 숫자만 바라보며 속을 태우고 있을 뿐이다. 시험은 언제, 어떻게 보는지, 대학 입시는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욘드 코로나의 관점에서 던지는 질문은 아주 강력하고 묵직한 직구 같다.
아직 답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겹눈 사고법의 핵심 역시 답이 아닌 질문에 있다. 꾸준히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야 하며, 당장 다음 주와 다음 달, 그리고 올해 말과 내년,
마지막으로 그 이후 교육, 입시는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비욘드 코로나의 관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