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혼자 살아가는 중입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집 근처 지역아동센터에서 장애아 전담 돌봄 교사로 일했다. 내가 맡은 아이는 열한 살 여아로 덩치는 또래보다 크지만 기초학습능력은 일고, 여덟 살에 불과한 경증 지적장애아였다. 그래도 말귀는 잘 알아들어 옆에서 끼고 가르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 아빠 모두 지적장애자여서 가정 내에서조차 제대로 된 학습지도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가 산마리오 캐릭터 쿠로미를 좋아해서 아이의 이름을 쿠로미로 쓰겠다.)
센터에서는 쿠로미가 한글은 다 아는데 아직 구구단을 못 외우니 그걸 외울 수 있게 지도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쿠로미는 한글도 몰랐다. 저학년 그림책을 읽게 했는데 소의'혀'를 보고 "이거 해예요?"라고 물었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매일 밥 먹고 이 닦을 때마다 보는 곳인데? 쿠로미 입장에선 모를 수도 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너 한글 잘 모르지?"라고 해버렸다. 쿠로미가 발끈했다. "아는데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알거든요! " 그러고는 혼자 읽겠다면서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가 쫓아가자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얼른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시 교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멋진 여자가 되려면 한글은 지금보다 더 많이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 말에 쿠로미가 발끈했다. 무슨 소리예요? 난 예쁜 여자 될 건데! " "예쁜 것보다 멋진 게 더 좋은 거야." "아니거든요! 멋진 건 남자고 예쁜 건 여자거든요!"
난감했다. 쿠로미에게 당장 필요한 건 성교육인 것 같았다. 이제 열한 살인데도 벌써 생리를 시작했고 생리를 몸에서 피 나온다고 말하는 아이라서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하는 남자라도 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생리를 한다는 건 이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거라고, 쿠로미 너도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거라고 하면서 네 몸을 사랑하고 아무도 함부로 만지게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하지만 며칠 후 걱정스러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쿠로미가 못 보던 새 리본핀을 하고 왔길래 예쁘다고, 누가 사줬냐고 했더니 옆집 오빠가 사줬다고 하는 거다. 옆집오빠라는 말에 기분이 싸했다. 옆집 여자아이에게 핀을 사주는 친절한(?) 오빠의 나이가 궁금했다. 오빠가 몇 살이냐고 물으니 열아홉이란다. 열아홉? 엄마도 아는 오빠냐고 물으니 갑자기 오빠 아니고 삼촌이고 나이는 스무 살이란다.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네가 501호 사니까 그럼 그 삼촌은 502호 사냐고 했더니 또 말을 바꿨다. 시장에서 물고기 파는 삼촌인데 엄마도 잘 안다고...
내가 삼촌이랑 생선가게 이름을 알아오라고 했다. 내가 시장 생선가게 주인을 다 아는데 스무 살짜리 사장님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쿠로미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왜요?" "응. 쿠로미 예쁜 핀 사줘서 고마워서 쌤이 생선 많이 팔아주려고. " 쿠로미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데 한 시간 뒤 쿠로미 엄마가 센터로 전화를 했다. 쿠로미 리본핀 누가 사준 거냐고...
나중에 알게 됐지만 쿠로미에게 리본핀을 사준 남자는 여자친구 구한다는 글을 써서 가게 앞에 걸어둔 스물일곱 살 청년이었다. 쿠로미가 센터에서 집에 갈 때마다 진열된 생선을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다 친해진 모양이었다.
'리본핀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어 다행이지만 쿠로미의 성교육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장애아동 성교육 방법을 찾아보고 장애아동보호센터에 전화도 해봤지만 내가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사이 4개월의 계약기간이 끝나버렸다. 한글과 구구단도 떼고 성교육도 완벽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어느 것 하나 끝내주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 마지막 날 서운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정작 쿠로미는 새로운 언니 실습생 에게만 인사하고 그냥 쌩 가버리더라. 쫓아가서 꼭 안아주고 잘 지내라고 인사라도 할까 했지만 마음속으로 잘 지내라고, 꼭 '멋진 여자, 예쁜 여자' 되라고 응원했다. "쿠로미,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