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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목 Sep 19. 2021

그들은 조명등 아래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고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젊은 작가상 대상을 받은 전하영의 소설로, ‘소설 보다 겨울 2020’에 수록되어 있다.

소설의 시작 부분, 장 피에르를 닮은 남자에게 미묘한 호감을 느끼던 ‘나’는 그 남자를 통해 장 피에르의 기억을 소환해 낸다. 연수와 ‘나’는 대학 동기로, 장 피에르의 수업을 함께 들었고 우울한 분위기를 가진 장 피에르를 연민하고 동경했다. 현재의 ‘나’는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그런 분위기를 가진 남자들이 가진 권력과 그 이면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체념적인 태도로 그런 남자들에 대한 자신의 끌림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게 체념적인 정서를 끝까지 끌고 가지 않는다. ‘나’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의 결말은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로 보이는 이 소설은 미투 운동이 촉발시킨 한국 예술계의 변화 전반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 사람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고 말했어.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고귀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연수는 체념적이고 비밀스러운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결벽적일 정도의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사람은 한 가지 상태로만 고정된 채 존재할 수 없다. 무해하고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요구받는 여자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해 자신의 성장을 막으려는 시도를 지속한다.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느낄 필요 없었던 절망감을 느끼지만, 남자들은 그 절망감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거나 탐미적인 시선으로 집요하게 바라본다.


‘나’는 연수의 눈가에 없었던 주름이 생긴 것을 발견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무지막지하게 ‘예쁜’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연수는.” ‘나’는 과거에 연수의 말을 들으면서도 연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하는 동시에 연수의 눈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수의 주름을 인식한 순간과 “예전과 달리 나는 연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하는 순간이 동시에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기성 예술계에 열정을 쏟았던 사람들은 그 시선을 학습할 수밖에 없고, 여성 자신도 마찬가지다. ‘나’는 연수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설명되지 못하고 이전에 생성되어 왔던 잘못된 경로를 따라 우회를 거듭하다 완전히 다른 곳으로 향하거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재현된다.


한편으로, 어떤 여자를 예쁘다고 생각하며 그 여자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건 이성애 도식 안에서 봤을 때 로맨스의 시작이 분명한데도 누구도 그런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가 장 피에르에 대해 생각할 때 그 마음은 호감 내지 사랑으로 독해될 경로가 너무나 다양하다. 남자에 대한 작은 동경도 그에 동반되는 증오도 사랑으로 쉽게 오독된다. 반면 여자에 대한 마음은 사랑이라도 질투나 미움 등으로 쉽게 수렴된다. ‘나’는 연수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술에 취하고 나서야 “연수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가. 장 피에르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하는 게 아닌가 좀 헷갈리기도 했고,”라고 마음의 일부를 내비친다.


책 속에서 여자를 두 종류라고 말하는 남자의 말에 자신과 연수를 대입시켜서 설명하려 했던 ‘나’에게 연수는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될 거야”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언제나 남자의 시선 속에서 규정되어 왔던 연수는 더 이상 바라봄을 당하는 자리에 있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나’의 과거 이야기 속 연수는 반짝이는 통찰력을 지녔다. 연수는 ‘타인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과 ‘자신이 되고 싶은 것’ 사이의 괴리를, 동경하면서 미워하는 그 남자를 만나는 것으로 해소해 왔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말이지, 불가능한 걸 꿈꾸는 대신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돼. 근데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가끔씩 나는 뭔가 다른 게 되고 싶거든.” 이렇게 말하던 연수는 이제 되고 싶은 게 되겠다고 말한다.


“영화 상영 후에는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한국인 감독은 저멀리, 나로부터 아주 저멀리, 밝은 무대 위에 앉아 있었고 그때는 그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강한 조명이 그의 얼굴에 반사되었다.” 어리고 아름다운 연인을 데리고 등장한 남자 감독을 보며 ‘나’는 절대로 저 사람과 같은 삶을 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납득하고 있었다. 그 남자 감독의 얼굴은 마치 조명등 그 자체인 것처럼 표현되었다. 여자들은 스스로 빛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을 포기당하고 조명등 ‘아래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들을 동경하는 ‘나’처럼, 그의 어린 연인이나 연수처럼.


‘나’는 물리적으로도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장 피에르와 함께 파리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오는 연수를 기다리면서. 그 시간은 남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여자 주인공의 친구로만 남은 채 뒤에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며 연수와 장 피에르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간에 연수 역시 다른 조명등 아래에 서 있었다. 서로 다른 남자에 의해 느낀 분노가 굴절되어 서로에게 향한다.


장 피에르는 마치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같이 생생하지만 그런 남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죽음으로 완전무결해지는 남자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 고전을 동경하는 남자들. 그들의 창작물에서 나와의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은 무언가 이야기 같은 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내 인생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 부분을 좀 더 들여다보고 있다가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서가 제일 아래 칸 귀퉁이에 몰래 책을 꽂아 놓고 돌아섰다. 이 책이 서가에서 영영 길을 잃기를 바라면서. 나에게로 향하는 어떤 힘의 작용이 제 방향을 놓치길 바라면서.”

평생 남자들의 예술에 감화되어 온 ‘나’는 그 남자들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그들과 자신 사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성인 자신과 완전히 다른 위치에서 태어나고 자라 온,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을 예술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남자들에 대한 동경을 그만두기로 한다.


‘나’는 장 피에르 같은 분위기의 남자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불가항력적으로 끌리고, 깨져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가로등을 보고도 불이 들어오지 않을까 올려다본다. 하지만 앞으로 올 여자들은 그 노란 불빛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나’는 안개꽃 다발을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린 여성을 보며 자신의 과거와 동일시한다. ‘나’는 그 ‘안개꽃’이 분명히 장 피에르를 닮은 남자의 어린 연인일 거라고 여기지만 그는 시트러스 향이 나는 다른 여자의 손을 잡는다. 이제 여자들은 조명 아래에 멈춰 서지 않는다. 장 피에르로 대표되는 남자들에 대한 어떤 동경도 미움도 없이, 여자 둘은 손을 잡고 코너 너머로…… 사라진다. 어쩌면 그들은 새로운 조명등을 발견할 수도, 그 조명등이 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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