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한나 Aug 31. 2023

타래

10화 포근하게 얽히는

1. 타래


"아르바이트 구인 사이트 이력서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그 날 1시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구인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린 적이 없었지만, 바로 B가 한 짓임을 직감했다.


"청담동 이자카야, '타래'입니다. 박...한의님? 현재 구직중이신가요?"

B가 건넨 명함 속 업체였다.

"네, 맞습니다."

"혹시 면접은 언제쯤 가능하실까요?"

"아,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음... 그럼 오늘 3시쯤 바로 가능하실까요?"


2. 면접


정말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 일본 오사카 영주의 궁전처럼 생긴 2층 건물이었는데, 누가봐도 고급스러운 술집이었다. 노란색 할로겐 조명이 가득 번져있지만 약간 어둡긴 했다. 그렇다고 퇴폐적인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박한...의씨 맞으신가요?"

길고 마른 남자가 반겼다. 검은 마스크와 검은 옷, 그 틈으로 비치는 흰 피부가 명백한 대조를 이루었다.

"네 맞습니다."


그와 룸으로 들어갔다. 룸이라지만 한 쪽면이 유리로 탁 트여 있어 바깥이 다 보였다. 이름, 나이, 사는 곳, 군대를 다녀왔는지 등등 인적사항들을 물었다. 혹시나 나와 B의 연관성에 대해 알고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런 낌새는 없었다. 나를 일반적인 아르바이트생처럼 대했다. 아니, 그 이상의 품격으로 대해주셨다.

전화에서도 느꼈듯 그는 선하고, 부드럽고, 정중한 인상이었다. 정중한 것만으로 따지면 B 역시 마찬가지지만, B의 정중함은 그 속에 묵직한 철퇴를 숨기고 있는 반면, 이 남자는 선한 예의 그 자체로 느껴졌다.


"혹시 고향이 어디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대구입니다."

"아하, 사투리가 조금 있으시더라고요. 대구에도 저희 지점이 있는데 아시나요?"

"아뇨, 처음 들어봤습니다. 타래가 체인점인가요?"

"네. 체인점으로 운영되긴 하나, 여기는 직영 본점이에요. 저는 여기 점장, '정지훈'이라고 합니다."

그가 마스크를 벗고 인사했다. 여전히 희고 선한 이미지였다. 다만 예상보다 잘생겼고, 소년미까지 느껴졌다. 덮은 머리가 비슷해서 그런가 나와 닮았다는 느낌도 들었다. 20대처럼 보이다가도, 볼살이 없다는 것과, 점장이라는 직위를 근거로 30대 초반 정도-라 짐작했다.


"혹시 궁금하신 것 있으신가요?"

"사장님은 그럼..."

B는 이곳의 사장과 지인이라 했다. 조심스럽게 사장에 대해 물었다.

"아, 사장님은 가끔 오시긴 하는데, 거의 안 오세요. 실질적으로는 저희가 관리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셔도 뭐, 지인들이랑 술 마시러 오시는 게 대부분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3. 꽤 괜찮은


룸을 열고 나서니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계산대 쪽에 서 있었다.

"이쪽은 매니저 강인재"

보통 키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사람, 약간 날렵해보이는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이쪽은 직원, 이주역"

180정도 되는 키에 5대5 가르마를 탄 사람, 쌍커풀 짙은 크고 맑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키가 되게 크시네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 넷입니다."

"와, 농구 잘하시겠다."

주역은 붙임성이 좋은 사람인 듯 했다. 모두 멀끔하게 잘생긴 사람들이었다, 괜히 기가 죽을 정도로.


"이 분은 박한의, 오늘 면접 보러 오셨어. 오늘 내일 중으로 연락드릴 거예요."

"또 봬요!" 지훈이 살갑게 손흔들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제조사 사장님과 연락해서 재고 1천부 생산을 부탁드렸다.

꽤 괜찮은 함정이라 생각했다.


4. 첫 출근


첫 출근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출근 시간은 5시, 토,일,월,화,수, 주 5일 출근, 홀서빙 직원은 5명, 5가 여럿 겹쳤다. 5시에 출근하자마자 주역이 반겼다.

"어, 왔구나? 이리 와봐."

그는 직원 외 출입금지라는 표시가 붙은 방으로 데려갔다. 술짝들이 모여있는 창고였다.

"여기, 유니폼이랑 바지는 아마... 이거 입으면 될 거야. 입고 나와, 밥 먹자."

검은 유니폼과 검은 바지를 건넸다. 바지가 짧아서 발목이 훤히 다 보였다.


"바지가 맞는 게 없구나? 니가 크긴 크다."

인재 매니저님이 말을 던지며 앞질렀다. 그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박한의라고 합니다."

주방 직원분들께도 인사드렸다. 그곳의 3명 모두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식기와 음식들을 함께 나르고 모두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점장님과 매니저님, 주역님과 나, 그리고 동민씨라는 또다른 직원 분, 그리고 주방 직원 3명이 나란히 모여 앉았다. 모두 남자긴 했지만 왠지 포근한 느낌이었다. 메인으로 나온 돼지고기 김치찜도 참 맛있었다. 누군가 직접 차린 음식을 사람들과 나눠 먹는 일은 참 오랜만이다. 첫 출근에 첫 식사는 꽤 인상적인 경험으로 남을 테다.


업무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물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한 탓도 있다. 이게 첫 아르바이트는 아니다. 이전에도 술집과 고깃집 등에서 해본 경험이 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아무리 능숙한 운전자라고 해도 다른 차를 처음 몰면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자기 차라고 해도 실수하는 걸요. 저희도 다 실수해요."

조금 얼어있는 내게 점장님이 따뜻한 말을 건넸다. 늘 이곳 직원들은 일의 능률과 손님들의 만족 이상으로, 직원의 안전과 안정을 중요시해주었다.

실수로 잔을 깰 때면 나를 더 걱정해주었고, 남은 반찬이나 탄산 음료 같은 것들은 집에 들고 가라고, 그래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면 서럽잖아. 나도 없을 땐 다 그랬어." 실제로 인재 매니저님이 건넨 말이다. 그러면 늘 주역 형님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다 챙겨가, 다 가져가. 어차피 우리 돈도 아니야. 사장님 돈이지."


'저는 강남 대저택에 살아요...'


뭐, 그게 위선일지라도 그런 배려들은 더 큰 자극이 된다. 이들이 내게 그랬듯, 나도 이들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극말이다.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매 근무마다 작은 수첩과 펜을 챙겨다니며 손님의 주문을 받아적고, 설거지도 바로바로 했다. 업무의 능숙도는 점점 올라갔고, 직원들 속에도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5. 꿈


"힘들진 않아요?"

설거지를 하는 내게 점장님이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네요. 올해 나이가 스물 넷이죠?"

"네, 맞습니다."

"한의씨는 전공이 뭐예요?"

전공에 대해 답해야 할 때면 항상 어색한 웃음이 나온다. 선택하지 않을 진로에대한 모순 때문인가...

"융합생명공학과입니다."

화학공학과 생명공학을 배우는 학과라고 덧붙이자 겨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취직은 걱정 없겠네요. 전공 공부는 할만 해요?"

"하하... 아뇨, 전공이랑 잘 맞지 않습니다."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어색한 웃음을 이어갔다.


"한의씨는 꿈이 뭐예요?"

익숙한 흐름이다. 전공에 대한 부정에서 진로와 꿈으로 이어지는 물음, 매번 이것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그렇게 싫진 않다. 다만 싫은 것은 나의 답변 이후 이어지는 의심과 걱정 어린 시선들이다.


"창업을 할 겁니다."

- 늘 그렇듯, 낮고 단단하게 말했다.


"아... 가게를 차릴 건가요?"


서울의 좋은 학교에, 어느 정도 미래가 보장된 학과를 다니는 아직 젊은 대학생이 창업을 한다고 하면 궁금증과 걱정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굳이 안전한 길을 가지 않는, 혹은 허세와 치기 어린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대다수다.


"그것도 방법일 순 있겠지만, 자기계발과 관련된 도구를 만드는 일입니다."

- 그게 가게를 여는 일과 같이 친숙한 일이 아닌, 조금은 낯선 분야라면 특히나. 그래서 일부러 너무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띵동- 벨이 울렸다. 점장님께서는 천천히 정리하라며 직접 주문을 받으러 가셨다. 물 한 모금 마셨다. 이렇게 대화가 끊기는 게 오히려 낫다.

사실 잘 알고 있다. 내 꿈에 대해 설명할 때 사람들의 표정과 이어지는 물음들이 신경 쓰이는 건, 그들이 무례해서가 절대 아니다. 나조차도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게 될까? 누가 쓰는데? 굳이?- 이런 당연한 물음들은 돌풍이 된다. 아직 강하지 못한 나는 흔들린다. 결국 무너지려나... 하는 걱정이 든다. 미래에 대해 말하는 건 단순한 대화가 아니다. 가능성에 대한 시험이다. 아직 젊은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시험을 봐야되는 셈이다. 항상 가방에 노트를 들고 다니는 것도 그 시험들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걸 직접 만지고 본 사람들은 '그게 허황된 말만은 아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에도 '이게 될 것 같냐?'- 라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아직 주문량은 물론, 인지도도 전혀 없다. 완전 초기 단계.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혹여나 포기라도 하게 될까봐 무서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람, 남자 B는 도와주겠다고 말했었다. 그 속엔 의도와 불순한 조건들이 가득할 지 몰라도, 나는 그 사람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돈이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만,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그가 나를 받쳐준다는 것만으로도 심적인 위안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금은 고마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6. 부러워요


2시쯤, 오늘 일도 끝났다. 동민 형님은 늘 집이 멀어 먼저 떠나고, 인재 매니저님과 주역 형님도 둘이서 맥주 한 잔 하겠다며 먼저 떠났다. 내게도 같이 마실 건지 물었지만 내일은 1교시 수업이라 조금 힘들다고 했다. 나와 점장님이 마지막으로 가게를 나섰다. 가는 방향이 비슷해서 조금 걸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했어- 와 같은 말들을 주고 받은 뒤, 꽤 오래 말이 없었다. 점장님의 집은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의 거리였다. 택시가 몰려 다니는 큰 도로 앞에서 각자의 길로 헤어질 쯤, 그가 입을 뗐다.


"부러워요. 젊은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려고 하는 일말이에요. 나는 왜 그러지 못했나- 후회하던 중이었거든요."


응원할게요. 가끔 소식들려줘요-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내릴 만큼

따뜻한 사람,

그리 무겁지도 않고,

딱 포근한 정도.


몸 누일 곳 없이 방황하던 서울, 의지할 사람이 또 하나 늘었다. 어느덧 집도 나의 물건들이 하나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새로 찍어낸 재고를 포함해서, 봄옷들과 대학 교재, 타래에서 받은 탄산 음료들...


6. 첫 미션


작업을 하려고 킨 컴퓨터에 못 보던 파일 하나가 생겼다. 클릭 해보니 어떤 메모 파일 하나가 있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들 사귄 걸 축하해요.


새로운 친구들 사귄 걸 축하해요.
적응도 잘 마무리한 거 같네요. 아주 보기 좋아요.
이 역시 새로운 선물이라 생각하면 좋겠네요.

이제 첫 미션을 수행할 때가 됐습니다.
3월 24일 토요일 10시
87번 룸 예약 손님 중
검은 구두,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있을 겁니다.
익숙한 얼굴일 거예요.
첫 미션이라 절차들을 많이 간소화 해뒀습니다.

새벽 3시 여기로 와요.
해야할 일을 해요.
내가 갈게요.


오늘로부터 3일 후 첫 미션, 익숙한 얼굴이라니...

그것보다도 조금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80번대 룸은 2층에 있다는 것. 2층은 아직 초기인 내가 맡지 않는다. 현재는 주역 형님이 담당하고 있는 상태인데, 그 방에 있는 손님과 어떻게 접근한다는 말인가.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는 카운터에서 정도...


"오늘은 2층에서 주역이를 좀 도와줘요."

"네?"

"2층에서 도와주면서 2층 일들 좀 배워요."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딱딱 맞아 떨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UPGRAD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