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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한나 Jul 15. 2023

UPGRADE

9화 : 치즈 앤 트랩

결국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1. 환영합니다          

통창으로 밀려오는 햇살이 환하게 반겼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 배우가 분했던 기택(아버지)이 지하실 생활이 끝난 뒤 마주할 풍경이 이런 것일까. 시공이 뒤틀린 듯 평화와 여유가 밀려왔다.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소파 테이블에는 편지가 놓여있었다. 와인빛 봉투에 담긴 편지지, 그 질감 역시 고급스러웠다. 그 내용은 계약에 관한 것을 문서화 해둔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 집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관리비와 요금 같은 것들 역시 무료.
단, 지정한 날짜에 자신-남자 B-이 정한 조건의 여자와 관계를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

"환영합니다."라는 말도 담겨있었다. 그럼 그렇지 튕기긴 왜 튕겨-라는 말처럼 들렸다. 재수없는 새끼.


의심이 밀려와 바로 집안 곳곳을 뒤졌다. 혹시 모를 카메라나 다른 장치 같은 것들이 있을 것 같았다. 거대한 TV의 화면이나 화장실 거울이나, 침대 밑, 천장 등등을 곳곳이 뒤져보았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 야비하게 굴 사람은 아니었어.'

그렇게 자기 최면인지 진짜 신뢰인지 모를 생각을 하며 지저분한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장 문을 열었을 때였다. 옷장도 하나의 큰 방이었는데, 스위치를 켜자 펼쳐진 광경에 소름이 끼쳤다. 그곳은 옷장이 아니었다. 방 전체에 딱봐도 고가의 카메라부터 초소형 카메라, 고프로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카메라들이 첫번째 옷장에 전열되어 있던 것이다.



맘껏 써요-

병신 같은 편지도 붙어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2. 내 것들

침실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난 뒤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모텔 가운과는 달리 아주 보송한 촉감이었다. 밖에는 고급 스피커로 틀어 놓은 팝 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둔 것도, 에어컨을 튼 것도 아닌데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천장에 자동 공기청정기가 가동되고 있던 것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거실로 나와 투명한 유리컵에 냉수 한 잔 담아 마셨다. 캬- 그냥 물인 줄 알았는데 탄산수였다. 아주 톡 쏘는 쾌감이었다. 짜릿했다.


이후 집을 구경했다. 비트에 맞춰 춤추듯 걸었다. 화장실 2개, 넓은 부엌, 아늑한 침실, 그것도 2개, 드넓은 거실과 깔끔한 서재까지.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서재였다. 서재라기보다, 홈 오피스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창업을 하는 나에게는 가까운 곳에서 작업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꼭 필요했다. 또한 너무도 갖고 싶었던 맥 컴퓨터에 듀얼 모니터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책장은 대부분 비어있었으나 맨 위 가장자리 칸에는 책 몇 권이 진열되어 있었다.

<타이탄의 도구들>, <사랑의 기술>, <경영학개론>, <설득의 심리학>...과 같은 자기계발 및 창업 관련 서적들이었다. 몇 권은 읽은 것들이고 몇 권은 읽지 않은 것들이었다. 거기도 편지가 있었다.


선물❤ 도움이 되길 바라요.-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또 터져나왔다.


서재 의자에 앉아 맥을 켰다. 애플은 처음 쓰는 거라 긴장이 되었다. 인터페이스가 많이 다르다던데, 키보드 배열도 많이 다르다던데... 걱정이 밀려왔지만 웹 서핑 몇 번 해보니 금세 익숙해졌다.


사람은 참 무섭다.

금방 적응하고, 금방 의심을 풀게된다.

아무리 악마일지라도, 심지어 그걸 이미 알고 있을 지라도 그가 고도의 친절을 보인다면 묘한 정까지 들게 된다.


흥분도 잠시, 익숙해진 고도의 친절 속에서 그간의 노숙 생활로인한 피로가 질식할 만큼 밀려왔다. 이번엔 다른 침실에서 잠을 자보았다.


3. 학교 생활

그렇게 윤택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강남에서 학교까지 30~40분 정도 걸리는 게 큰 흠이긴 했는데 그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아침 9시에 수업이 있어도 편안한 침대 덕에 7시 전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눈이 떠지면 아침 운동을 간단히 하고 샤워를 하고, 스타일러에서 잘 관리된 옷을 입고 출발한다. 완벽한 시작만으로 하루 전체가 완벽해진다. 걸음걸이마다 경쾌한 팝송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몸에서 나는 냄새가 들킬까 사람을 피하며 다녔는데, 이젠 먼저 자연스러운 인사를 건넨다.

물론, 그 이상의 대화는 없다. 내 전공은 내 진로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학과 사람들과는 길이 다르니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마련이었다. 수업 내용이 어렵니, 어떻니-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가볍게 앞지른다. 수업을 아예 듣지도 않았다. 그냥 출석만 한 거고, 맨 뒷자리에서 책을 읽거나, 고객 관리를 하거나, 지원사업들을 리서치한다.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게 더이상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확신이 든다.


나는 기생충이다. 현재는 편하게 숙주에 기생하며 그의 양분을 빨아먹고 살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걸 안다. 자생할 수 없는 기생충은 반드시 죽기 마련이다. 당장의 편안한 생활에 안정을 느끼더라도 중독되진 말자, 착각하지 말자. 나는 다시 자립해야하며, 그게 아니라도 조금 더 안정적인 숙주를 찾아야만 한다.


4. 사업

고향에 둔 노트 재고-현재 진행중인 사업-를 모두 현주소로 옮겼다. 어머니께서 도와주셨다. 기숙사에 살고 있다고 거짓말 했는데  배송지가 기숙사의 것과 달라서 마음 졸였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들키지 않았다. 며칠만에 도착한 재고는 서재 한 켠에 가득 쌓아두었다. 그러고도 충분히 쾌적한 공간이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할 때다. 홍보 컨텐츠를 제작하고 SNS에 올렸다. 밀린 주문들도 처리하고,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외의 판매처를 확장해갈 준비도 했다. 이미 제작된 판매 페이지를 다른 사이트들에 등록만 하면 되는 구조라 생각보다 간편했다.


약간의 걱정이 있다면 재고가 많지는 않다는 것. 힘들게 따낸 지원 사업으로 상품을 제작하긴 했으나 그 지원금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재고량은 현저히 적었다. 더구나 상품의 퀄리티를 높이다 보니 제조단가도 비교적 높았다. 꾸준히 홍보 컨텐츠를 제작하고 있긴 하나, 유료 광고로 노출량을 늘리지는 않았는데, 이 역시 재고량의 부족때문이다. 혹시라도 폭주할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기에.


머지 않아 대출을 받아서라도 재고를 찍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 길로 나아갈 생각이라면 확실히 그래야만 한다.


대출-

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 집의 주인이 떠올랐다. 바로 지워냈다.


5. 드라이브

"지낼 만해요?"

어느 아침, 대문을 나서자마자 그 사람이 있었다. 검은 차 뒷좌석에 양복차림으로 앉아 창문만 열어 놓았다.

"점점 출근이 늦네요. 이제 적응되나봐. 아, 출근이 아니고 등교인가."

내 생활을 꿰고 있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카메라라도 있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냐 아냐. 카메라 같은 게 아니라 센서야 센서. 문 열리고 닫힐 때마다 알림이 뜨거든."


"잘 지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그쪽은 잘 지내셨나요?"

잔뜩 경계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예의를 갖춰 물었다.

"그럼요. 얼굴도 많이 좋아졌네. 진짜 살만한가봐요."

오랜만에 바르고 나온 헤어 왁스가 따가웠다.

"타요. 할 말도 있고. 학교까지 데려다 줄게요."

괜찮다-고 거절하려다가 다시한번 "타요-"라는 말의 중압감에 눌려 차문을 열었다.


차문을 열자마자 머스크 향이 코에 스몄다. 품격있는 향기였다.

"기사님, 건국대학교로 가주시면 됩니다." 그 사람은 운전석에 앉은 사람에게 내 학교를 알려주었다. 정중한 말투였다.


"어때요, 한 달 정도 살아보니까 지낼만 합니까?"

"네. 쾌적하더군요."

"공간과 위치가 사람을 바꾸는 법이에요. 기대가 되네요, 얼마나 더 바뀔지."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남은 재고, 얼른 처리해요."

"네?"

"카카오톡 오픈 채팅으로 챌린지를 개설하는 거예요. 100% 달성 시 100% 환급 챌린지."

단호하게 끝나는 문장들에 몇 번이고 머리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재고 60%는 챌린지로 처리하고, 30%는 무료로 배포해요. 인플루언서든 누구든 홍보 잘 하는 사람으로. 10%만 가지고 있는 겁니다.

당신 제품, 나쁘지 않아요. 근데 아무도 몰라요. 더구나 컨텐츠가 확실히 정해진 제품인데 그 컨텐츠조차 뭔지 아무도 몰라. '목표 100일 100번 쓰기'요? 굉장히 매니아틱합니다. 대부분 모르는데 누가 사겠어요?


문화를 만드는 겁니다.

문화를 만드는 건 소수로부터 시작해요.

그것에 열광하는 소수요.

먼저 그 소수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미 잘 알고 있죠?"


이미 잘 알고 있냐-는 물음이 그런데도 왜 실행을 하지 않느냐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무료로 배포하고, 챌린지로 환급해주고... 그러면 추가 재고 생산은 어떻게 하죠? 돈이 없는데..." 변명하듯이 답변했다.


"벌어야죠.

아님 갚든지."


6. 이중 트랩

"받아요."

그가 건넨 것은 통장과 체크카드였다. 또 명함 몇개도 담겨있었다.

"2천 넣어놨습니다. 사업에 쓰세요.

명함 하나는 제조업체 명함입니다. 30년이상 베테랑 업체입니다. 알고지낸 지도 10년 넘었고요. 가장 저렴하고, 높은 퀄리티로 제작해줄 거예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기쁨과 불안이 동시에 멤돌았다. 이 호의의 대가가 얼마나 클지 궁금하던 찰나, 바로 답해주었다.

"다른 명함은 당신이 앞으로 일해야 할 곳입니다. 1년 정도 일하면 생활비하고도 2천 정도는 갚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제가 학교를 가야하는 데..."

"집 근처 이자카야에요. 홀서빙 업무고요. 시간은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주 5일 파트타임 근무입니다. 일상에 지장없을 겁니다. 언제 일할지는 그쪽이랑 정해요."

그곳 사장이랑 지인이며, 복지와 급여가 매우 좋은 조건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다른 곳에서 일하는 건 안되나요?"

"안 됩니다. 집에, 대출에... 이 정도 호의면 그 정도 제약은 감당해야죠."

"제가 방학 때는 대구에 내려가봐야 하는데... 부모님이 걱정하시거든요."

"그것도 본인이 해결해야죠. 독립할 때 됐잖아요?"


"왜 하필 이곳이죠?"

"거기에 제 스타일의 여성들이 많이 갈 겁니다. 우리 계약 조건 잊지 않았죠?"

"......"

"그것말고는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이상한 곳 아닙니다. 일반 술집이에요."

"허허... 참..." 헛웃음이 나왔다.


"이 돈을 그냥 안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간단해요. 이번 주 중으로 집 비워주시면 됩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자에게 도약은 없어요.

도약하지 않는 자는 매력 없어요."


"알겠습니다."

:"네?" 단호한 대답에 그가 당황했다. 그 모습이 조금 웃겼다.

"알겠다뇨?"

"저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모든 게 함정 같아요. 저를 더 깊은 수렁에 빠트리는 함정요. 당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고, 1년 간 당신과 연관된 사람 아래서 일하는 노예가 되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



"하지만"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다시 내게 꽂혔다.

"이 돈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다 갚으면 되는 거죠?"

"...... 그렇죠."

"1년이든, 한 달이든 쓰고, 다 갚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 그렇죠."

"받을게요, 그럼. 마침 일자리도 구하고 있었거든요. 여기서 일하면 되죠?"

"네?" 그가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자신 있습니다. 이번 학기가 끝날 때까지 다 갚아드릴게요."

"하하하. 정말 종잡을 수가 없네요. 그래요, 해봐요 그럼."



그가 준 것들을 가방에 고이 넣고, 차문을 닫고 내렸다. 강의시간에 방금 나눈 대화의 녹취를 확인했다. 선명하게 잘 녹음 되었다. 일하라던 이자카야도 검색해보았다. 탁 트인 거리에 있었고, 마약 유통이나 성매매나 장기밀매... 뭐 그런 더러운 일과는 엮이지 않은 듯 했다.


1) 이 사람이 시킨 여자랑 섹스도 해야하고

2) 이 사람이 정한 곳에서 일도 해야한다.


이거 제대로 얽혔다는 불안과, 또 풀려면 풀어낼 수도 있겠다는 자신-혹은 오만-이 동시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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