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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한나 May 29. 2023

계약

8화 : 현명하다는 착각 속에 빠진 물고기


"씻으라고요."

"재워달라고 부탁하려던 거 아니에요?"

"......"

"씻어요. 씻고 와요."


1. GAY          

씻고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샤워실 문 앞에 벗어둔 내 옷은 사라지고, 가운과 새옷이 있었다. 모두 명품 브랜드였다. 둘 중에 하나 택하라는 표시였으려나... 하지만 나는 경계하듯 둘 다 껴 입고 거실로 나왔다.

밝던 LED 조명은 꺼지고 노란색 무드등 몇몇이 촛불처럼 오묘하게 빛났다. 그 가운데 소파에 남자 B(집주인이자 호스트)가 앉아있었다. 그 맞은 편에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고, 암묵적 의도대로 앉아주었다. 가운데 소파 테이블에는 빈 와인잔이 놓여있었고, 남자 B가 손수 따라주었다.


"들어요. 아까 정신 없어서 못 드셨을 텐데 제대로 한 번 맛 봐야죠." 점잖은 변태의 눈빛이 느껴졌다.

"게이에요?"

직관적인 질문에 남자 B가 머금던 와인을 뿜었다.

"에?"

"게이냐고요."

B는 티슈로 주변을 닦으며 크흐흐흑 웃었다. "이런 게 참 좋아."

"뭐가요?"

"친구는 굉장히 의외의 구석이 있어."


무슨 말인지, 찡그린 눈매로 물었다.

"의외의 구석이 있다고요. 영락없는 애와 성숙한 어른의 격조가 예고없이 수시로 전환되네요. 그게 아이덴티티고 특장점이거든. 매력."


"...... 진짜 게이신가요?"


"눈 풀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다시 상대의 약점을 찾는 눈빛이 되었나보다. 경계를 조금은 풀며,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향긋했다.


"협상하려는 겁니다."

"네?"

"협상이요. 계약이요 계약."


2. 혜택

"친구, 집 없죠?"

"......"

"뻔해요. 학기 시작하고 쭉 노숙한 거 같은데. 씻지도 못하고, 잠도 편히 못 잤겠죠."

"......"

"난 친구가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제안하는 겁니다. 아마 그 나이에 친구같은 에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리고 노숙까지 해본 사람이라면 느끼겠죠. '집'이 필요하다고."


이어서 그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이 집, 이제 친구 집이에요. 50평 정도는 될 거예요. 최고급 인테리어에 모던한 디자인, 아침이면 햇살이 들거고, 저녁이면 아득한 야경이 보일 거예요. 풍경이 사람을 만드는 법이거든요. 관리비나 요금도 모두 무료입니다."

"...... 몸은 안 팝니다. 남자한테는 특히."

"끝까지 들어요."


"나는 당신께 집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원하는 건 뭐든 줄 수 있죠.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더 많은 물질과 기회들이 제공될 겁니다. 친구가 하고 있는 사업, 꿈... 친구는 거대한 야망을 지닌 사람 아닌가요?"

"......"

"아마 친구는 불안할 겁니다. 그 웅대한 이상과 초라한 현실의 격차를 어떻게 좁혀갈까... 그 생각에 늘 불안해하고 늘 꿈틀꿈틀대겠죠. '성공한 사람들은 늘 불안해하며 안주하지 않는다'는 말 들어본 적 있죠?"

"......"

"하지만 친구는 알고 있어요. 성공한 사람들이야 그럴 수 있지만 그 역, '불안해하고 안주하지 않는 사람이 모두가 성공한다'-는 건 아니란 걸. 도박쟁이들이나 거리의 노숙자들도 불안해하고 안주하지 않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렇죠?"

"......"


"저는 투자자입니다. 처음에는 집을 줄게요. 그리고 차근차근 더 많은 것들을 줄 거예요. 자본, 물질 등은 물론이고, 인맥, 지식, 기회까지 줄 수 있어요. 믿지 못해도 좋아요. 일단 확실하게, 이 집은 이제 친구 겁니다. 맘대로 써요. 무엇을 하든, 먹든, 누구를 초대하든 그 모든 게 다 자유에요."


"...... 조건이  뭔가요?"

"그렇죠. 큰 혜택에는 큰 조건이 따르는 법이겠죠. 하지만 제 조건은 그리 크진 않습니다. 물론,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 저는 가진 게 없어요."

"알아요. 친구는 한참 볼 품 없는 사람인 걸요, 아직은 말이죠. 하지만 분명 가진 건 있어요."


남자 B의 시선이 살짝 내 몸을 훑었다.


3. 조건

"저기요, 몸은 안 판다고요. 그딴 취향 없어요."

"나도 당신 몸 따위 관심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어필이 될 수는 있겠죠. 친구의 젊음과 몸, 준수한 외모와 강한 내면 같은 게..."

"네?"

"저도 여자 좋아합니다. 무지 좋아해요. 하지만 저는 너무 늙었습니다.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했죠. 아무리 관리를 하고, 수술을 해보아도 한계가 있더군요. 그래서 제안합니다."


30대 정도밖에 안 보이는데도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얘기하는 남자 B. 실제 나이가 도대체 얼마일까... 가늠이 되지 않는 그가 뱉은 조건은 혜택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날짜를 지정해드릴 겁니다. 친구는 이 집에서 편히 지내시다가, 그 날짜까지 이 집으로 여자를 데려오세요. 그리고 제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 사람과 하는 걸."

"네?"


"네. 섹스요."

이런 내용을 몇번이고 뱉어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에 굉장히 위화감이 들었다.


"네...?"

"어떤 여자인지 그 세부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추후에 공지하겠습니다. "

"저기요."

"녹화되거나 유포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런 것에서는 안전해요."

"아니 저기, 시발 그딴 건..."


"친구"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늘한 중압감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친구가 가진 건 그것밖에 없잖아요, 아직은요."

"......"

"친구도 그걸 잘 알잖아요. 그죠?"

그럴듯한 반박이 떠오르지 않았다. 화를 낼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4. 거절하는 방법

그래도 또 한 번 거절하려고 하던 참에 그가 먼저 일어났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기회야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되니까 편안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요. 강요가 아닙니다."

"......"

"일단 오늘은 편히 주무세요. 저는 이만 빠져드리겠습니다. 2층에 침실이 있어요. 원하면 1층 침실을 써도 됩니다. 저 방이에요."

가리킨 곳은 남자 A와 들어갔던 방이었다.

"정 거절하고 싶다면 간단해요."


오늘 일을 잊고, 이 집에 찾아오지 않는 것-

수락은 그 반대로, 오늘 이후 또다시 이 집에 찾아오는 것-

듣고 싶지만 들을 수밖에 없게 되는 도어락 비밀 번호 같은 것들도 알려주었다.

"입던 옷은 세탁 중이에요. 한 시간 즘 뒤에 건조까지 완료될 테니까 내일 아침 입고 가요. 건조기는 1층 침실 안에 있어요."

그리고 그는 떠났다. 이 외에도 수많은 으리으리한 저택이 있는 사람처럼 떠났다.



5. 편안한 잠

그가 떠난 후 나도 바로 일어나려했다. 일어나야 했다. 적어도 침실에서 편안한 잠을 자서는 안 되었다. 처음엔 옷이 세탁될 때까지만 기다리기로 하였으나, 눈이 감기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피곤한 상태서 술까지 마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쪽잠만 자려 했으나, 결국 잠결의 본능으로 침실을 열었다. 내 몸을 위해 존재하는 침대처럼 푹 내려 앉는 쿠션의 느낌이 황홀했다. 사실 그걸 느낄 새도 없이 깊이 잠들어버렸다. 막혔던 피가 흐르고,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비로소 천국에 당도한 것 같았다.


아무 꿈 없는 잠에서 깬 뒤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맨몸으로 거실로 나갔다. 눈부신 햇살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감촉이 좋았다. 햇살도 비싼 값을 하는구나... 1층에, 고도가 그리 높지 않은 집이라 생각했는데 창문 너머로 서울이 훤히 보였다. 비싼 만큼 멀리 보이는 풍경이었다.


너무 빠져들기가 무서워서 얼른 옷을 챙겨입었다. 건조기에서 꺼낸 옷의 감촉마저 완벽했다. 얼른 나가야지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다. 배가 약간 고파져서 냉장고를 열었다. 샌드위치와 커피, 생과일 주스 같은 간단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 이정도는 먹어도 되겠지...? 진짜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가방에 몇 개 담았다. 밖에서 사먹으려면 몇 만원은 써야했다. 가난해지면 도덕성이 옅어지고, 염치를 잃기 쉽다. 이렇게 길들이는 것이 그가 의도한 바일 테다. 그럼에도 나는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착각을 하며 그의 호의(혹은 유혹)만 낚아채야지, 그러곤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미끼만 먹고 도망치는 물고기처럼 말이다.


6. 다시


노숙자의 주말은 더 괴로웠다.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PC방에서 창업, 집 구하기 등 해야할 일들을 끊임없이 해보았다. 지치면 넷플릭스를 보거나, ASMR을 들으며 낮잠도 잤다. 그대로 새벽까지 자고, 앉아서 자는 것에 지치면 사우나 수면실로 갔다.


집을 구하려면 월 50만원 정도가 들고, 전세로는 계약금만 몇 천이 든다. 그럼에도 그것을 감당할 만큼 좋은 집이 나온다면 바로 계약을 해야지- 생각했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최상의 선택지를 경험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집 비밀번호가 아직까지 잊히지 않았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그의 미끼에 걸려들고 말았나보다.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도 지나고, 월요일부터 학교를 가고, 매번 같은 옷, 더 구질구질해진 냄새,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건강상태로 사람들 속에 섞이고... 계속 선택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더 망가지기만 반복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이성은 꼬이지 않았고, 목적이 '재워달라는 것'이 참 비참해지고... 그렇게 찬란은 잃고, 외롭고 구질하게 2주가 흘렀다. 


결국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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