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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한나 Sep 16. 2023

첫 번째

11화 익숙해지기


1. 2층

"2층은 창가 2인용 테이블 5개를 제외하면, 룸이 대부분이야. 예약 손님들이 주로 오지. 별 다른 건 없어, 그냥 뭐... 세팅만 미리 준비해놓으면 편해."

주역 형님은 2층의 매뉴얼에 대해 교육해주었다. 크게 어려워보이진 않았다. 내 관심은 오직 10시에 오는 손님, 그 중 검은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었다.


"혹시 오늘 예약 손님은..."

"아, 생각보다 많이 없던 데? 4팀 정도?"

"몇시에 옵니까?"

"7시에서 8시 사이에 거의 몰렸어. 한 번에 몰려오면 힘든데..."

"10시에는 예약이 없나요?"

주역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응? 그건 왜? 뭐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 아뇨 그냥..."

"2층은 12시에 마감해서 10시 예약은 거의 없어."




간단해 보이던 2층 업무가 생각보다 그리 쉽진 않았다. 익숙하던 1층 동선에서 벗어나다 보니 허둥지둥대기 일수였다. 그럼에도 주역은 작은 한숨조차 쉰 적 없이 괜찮아-라는 말로 웃어주었다.


"왜 2층의 버너를 내려보낸 거야?"

1층 강 매니저님의 무전이 들려왔다. 버너는 1, 2층이 각각 쓰는데 음식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2층 버너를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내 실수였다.

"아아, 미안 바빠서 잘못 내렸으~"

주역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답하고는 윙크했다.

"감사합니다..."

"다 그런 거지 뭐~ 처음부터 잘할 수 있나."

이곳 사람들은 다 포근하고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다.

2층은 CCTV가 설치된 1층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앉아, 저기 소주 박스 위에."

엉거주춤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예약석은 모두 입장 완료했는데 검은 드레스의 여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배우야."

나의 전공 이야기에서 창업 이야기로 넘어가다가 주역이 불쑥 이야기했다. 

"네?"

"배우라고. 밤에는 여기서 일하고, 낮이나, 일 없는 날에는 촬영다녀."

어쩐지 훈훈한 외모를 지녔더라니.

"여기 직원들 이상한 사람 많아. 의외의 일하는 사람들 말이야. 아, 많진 않구나. 인재 형이랑 동민이는 그냥 여기 일만 하는 거 같고..., 지훈이형도 배우였어."

"네? 진짜요?"

"응. 연극 배우를 주로 했는데, 뭐 매체, 영화 같은 것도 단역으로 출연하셨지."

"어쩐지 다들 잘생기셨더라고요. 역시..."

"하하핫. 근데, 지금은 안해."

지금은 안한다는 그 말이 조금은 슬프게 느껴졌다.

"지금은 그냥 스튜디오 운영하시면서 사진 찍어."

왜요?-라고 물으려던 찰나, 무전이 울렸다.


"87번룸, 여자분 하나 올라가셔."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2. 익숙한 얼굴

계단으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굴까, B는 익숙한 얼굴일 것이라고 했다. 전에 본 적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누구지?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주역이 그녀를 87번 방으로 안내했다. 나를 스쳐가며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씨익 웃었다. 너구나-라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이었다. 그날 그 저택 술자리에 있던 사람, 여자 A.


87번 룸의 벨이 울렸다.

"네, 뭐 필요하신 것 있으신가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주문을 받았다. 그 사람도 뻔뻔하게 내 눈을 바라보며 사케를 주문했다.

"오빠 사케 마셔도 되지?"

87번 방은 남자 둘, 여자 둘이었는데 그녀가 와서 2:3의 성비가 되었다. 남자는 50대쯤 되어보이는, 꽤 잘 나가는 직장인처럼 보였다.

"그럼~. 다 마셔."

"여기서 뭐가 제일 잘 나가요?"

교육 받은 대로, 메뉴판의 추천 사케 항목을 알려주었다.

"좀 드라이한 거 없나? 나는 어린 애들이나 먹는 단 거는 별론데. 드라이 한 걸로 추천해줘요."

사케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터라, 다른 잘 아는 직원을 데려오겠다고 말했다.

"아니. 가지말고. 나는 오빠가 골라줬으면 좋겠는데."

타이트한 검정 드레스, 기울인 자세때문에 가슴골이 다 보였다. 앞 자리 남자들은 헛기침을 하며 술잔을 비웠다. 나도 이 상황이 불편해서 드라이한 사케 항목으로 가서 가장 위에 있는 것 두가지를 추천해주었다.

"그래요 그럼 위에 걸로 줘요."

"네, 알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가는데 뒤에서 깔깔대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귀엽네-라는 목소리도 들렸다.

"쟤들 뭐하는 애들같냐?"

사케 준비를 하는 중에 주역 형님이 기웃대며 물었다.

"젊은 여자들이랑랑 늙은 남자 둘... 딱 봐도 사이즈 나오는데...?"

"뭐 어떤 건가요?"

"에이, 딱 봐도 나오잖아. 쟤들 조건만남이나 뭐 술집 그런 거야. 텐프로 뭐 그런 거. 남자 둘이서 세명이나... 대단하네..."

대충 예상은 했지만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스물 셋의 강남은 내가 처음 마주하는 세상의 민낯들을 가득 지니고 있었다.


3. 안녕

그 방에서는 그 여자의 목소리만 들렸다. 뭐가 그리 신나는 건지 큰 소리로 흥을 띄웠다. 비틀비틀 거리며 룸을 나서더니, 쿵쿵쿵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저기, 화장실이 어디에요?"

딸꾹질도 하며 잔뜩 취한 모양이었다.

"화장실은 저쪽입니다."

"저기요? 어디? 안 보이는데?"

내가 일어나서 안내했다. 그녀는 비틀 거리더니 대뜸 내 어깨에 기대었다.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화장실까지 부축 좀 해달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당황스럽지만 이대로 넘어지면 더 큰 일이 날 것 같아서, 어차피 몇 보 정도만 걸으면 되는 거리라 따라가 주었다.


"야, 나 안 꼬시냐?"

나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이는 목소리. 목 뒤로 서늘함이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취한 척 연기하고 있다는 걸.




12시쯤 되자 2층은 마감 준비를 시작했다. 12시까지 그 룸이 가장 오래 남아있었다. 남자 둘은 원래 있던 여자 둘만 데리고 나갔다. 그 여자는 혼자 바닥에 널부러져 잠들어 있었다.


"손님, 이제 마감이라 일어나셔야 합니다."

한 쪽 눈만 뜨더니 검지를 인중에 대며, 쉿-이라고 했다.

"5분만"

그러더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귓속말로, "저 새끼들 갈 때까지만." 그리고 

쪽- 뽀뽀 소리를 냈다.

"거기로 갈게. 회장님께 연락 받았어."


"2층 조금씩 배우면서, 나중에는 혼자 해봐요. 거기는 여유 시간들 좀 나니까 다른 일 같이 하기도 좋을 거예요. 학교 공부나, 창업 그런 거."

새벽 2시, 점장님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대문 앞에는 검은 드레스에 검은 구두를 신은 그녀가 서 있었다.

"늦었네."


4. 성공한 기분

"일찍 왔네요."

집에 들어가니 남자 B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여자 A는 꾸벅 인사했다.

"비밀 번호 바꿨어요?"

"..."

"그래도 소용 없어요. 자, 얼른 씻고 와요."

B를 마주치마자 피어난 묘한 수치심과 패배감까지도 샤워기 물줄기 속에 씻어냈다. 물기를 닦고 나오자 거실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고 인기척도 전혀 나지 않았다. 침실로 들어갔다. 여자 A도 침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나보다. 노란 무드등 아래 가운만 입은채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사람은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몰라도 된다는 뉘앙스를 건넸다.

"넌 나한테만 집중해."

그녀가 내 목덜미를 낚아채고 키스했다. 내 입술도 점점 열렸다. 그렇게 침대로 포개졌다. 그래, 잊자.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편이 더 좋겠다.

목덜미를 애무했다. 진한 향기가 났다. 고가의 고급진 향수란 것을 당연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입었던 검은 드레스, 검은 구두, 가방과 목걸이 등은 모두 명품, 그리고 나는 서울이 훤히 보이는 강남의 대저택에 거주하는 젊은 사람, 그 모든 요소들이 일찍부터 성공한 기분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가운을 벗기고 천천히 애무한다.

"크지? 자연이야."

한 손에 들어오지 않는 벅찬 크기, 살짝 붉은 빛이 감도는 봉우리를 혀로 부드럽게 녹였다. 부담스럽지 않은 신음이 옅게 번졌다. 시선은 창문에 맺힌 이슬처럼 미끈하게 내려왔다. 손가락을 넣었다. 모든 이슬이 그곳에서 고인듯 젖어있었다.

"천천히..."

"왜 이렇게 예뻐요?"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웃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올라섰다. 나보다 능숙하게 애무를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성감대들을 정확히 혀로 찔렀다. 스치는 머리카락조차도 거대한 자극이 되었다.

"어려서 그런가 더 맛있네."

"니가 더."

 내 말에 그녀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허벅지를 꼬집었다.

"누나한테 반말한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나이가 어디있어. 이름도 모르는데"

내 귀까지 올라와 속삭였다.

"그럼 더 막 다뤄줘."


비닐을 뜯어 입으로 콘돔을 끼워주었다. 그리곤 다시 뒤집었다.

격렬한 정상위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신음은 더 날카로워졌고, 나의 것도 묵직해졌다. 모든 감각 신경이 자극으로 다가와 내 몸을 휘감았다. 소리와 촉감, 짙은 향기와 섞인 땀냄새, 넓은 침대와 야경과 그녀의 몸매, 성공한 것 같은 기분들도...


"아까 그 아저씨들이랑 잔 적 있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자세는 어느새 바뀌어 후배위 자세가 되었다.

"그건 왜 물어?"

"그냥, 그 사람들 돈 많아?"

"변호사니까... 많겠지."

속도가 더 빨라졌다.

"좋아... 더 거칠게 해줘..."

"내가 더 잘하지? 내게 더 좋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거친 신음이 쏟아졌다. 격정의 순간을 지나 흥분의 불씨가 사그러들었다.


5. 그 남자

우리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여운이 다 가시지 않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배시시 웃었다.

"좋았어. 이게 얼마 만이니."

"항상 아저씨들만 만나요?"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아저씨든 니 또래든 돈 있으면 오케이야."

어딘가 지금 이 꼴마저 지켜보고 있을 남자 B가 떠올랐다.

"그 사람이랑도 했어요?"

"그 사람? 누구? 회장님?"

"네 뭐, 아까 집에 있던 사람."

"아니, 한 적 없어. 원체 비밀스러운 사람이라, 그 사람 이름도 직업도 아무 것도 몰라. 그냥 '회장님'이라고 불러. 돈이 무지하게 많다는 것- 그 정도밖에 몰라. 알아도 말해줄 수 없고."


그녀가 먼저 일어났다. 같이 씻을 거냐고 물었다. 대답도 듣지 않고 나를 끌어당겼다. 흐르는 물줄기 속에서 그녀가 나를 안아주었다.

"또 만났으면 좋겠다. 하는 일도 모두 다 잘 되고..."

작은 미소로 답했다. 사실 그녀를 또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내 귀에 속삭였다. 바로 귀 옆에 속삭이는 거라 흐르는 물 소리 속에서도 선연히 들렸다.


"넌 지금 덫에 갇힌 거야. 그 사람이 뭘 원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널 망치고 말 거야."


희망을 미끼로 잡고

약점으로 덫을 친 후

쓸 모 없어지면 죽여버릴 거야.


덥고 세찬 물소리만 울려퍼졌다. 거울을 뒤덮은 수증기를 닦아낼 때 남자 B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비쳤다. 그건 단순한 환상이었단 걸 자각하고 온 몸에 돋은 소름을 가라앉혔다.

"침대 시트 밑에 명함 넣어놨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싸게 해줄게."

아침 해가 밝아올 쯤, 그녀가 저렴한 속삭임을 남긴 채 집 문을 나설 때도 남자 B는 나타나지 않았다. 잠에 들 때도, 다음 날 아침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6. 메모장 편지

다음 날 점심 때야 일어났다.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고 그가 남겼을 메모를 확인했다.

어제는 급한 일이 있었어요.
인사도 못 하고 가서 미안하네요.

제가 있든 없든 너무 신경 안 쓰길 바라요.
의식하지 말고 편안하게 해요.
그게 더 즐거우니까.
다만, 어제는 너무 쉬웠죠.
아는 사람에, 제 발로 집까지 찾아와주는 사람이라니...

이제는 조금씩 어려워 질 겁니다.
차차 레벨업이 진행될 거예요.

다음 연락까지 사업 잘 키워놔요.
진짜 성공한 기분으로 절정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갔다니...

그녀와 섹스하는 내내 그를 신경썼다는 게 억울해질 정도였다. 나를 갖고 장난치는 느낌도 강하게 들었고, 이 역시 길들이는 과정 중 하나인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다 텍스트를 너무 맹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도 들었다. 과연 그는 먼저 간 것이 맞을까? 어딘가 꽁꽁 숨어서 지켜봐 놓고는 거짓말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쉬이 안심할 수 없는 사람임은 확실했다. 집 안에서 한 마리 바퀴벌레를 발견했다가 놓친 것같은 찝집한 느낌이랄까...


침대 시트 밑에는 구겨진 명함이 하나 있었다.

UI/UX 디자이너 황미연

미연은 꽤 잘나가는 기업의 앱 디자이너였다. 그런 사람이 왜... 이 역시도 성실함의 범주로 봐야하는가. 어찌 되었든 다들 가면 몇 개씩은 바꿔쓰며 바쁘게들 살아가는 군...


그래, 나 역시 바쁘게 살아가는 존재로서 오후의 출근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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