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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우리는 모두 나다운 일로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보시겠습니까?

by 해원

이십 대 중반, 공기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으로 '일'의 세계에 처음 진입한 나는 삼십 대가 된 지금까지 어린 시절 막연히 꿈꿨던 장래희망의 수만큼이나 여러 가지의 일을 해왔다. 안정적인 직장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공기업을 기어이 퇴사하고 IT스타트업에서 PM으로 이직했다. 이전 직장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하루하루 치열하게, 또 열정적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원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후 프리랜서 기자와 번역가, 취업준비생들의 자기소개서를 봐주는 취업 컨설턴트, 아이들의 독서 지도 화상 교육 강사로 일하며 어떻게든 직장 밖에서 살아남아보기 위해 애쓴 시간들이 있었다.


나의 이런 발자취는 직업이나 일의 종류로만 놓고 보면 통일성을 찾아보기 힘든 커리어패스라는 것을 안다. 4년간의 공기업 재직 기간을 제외한다면 산만하게 이것저것 기웃대는 성향인가 하는 오해를 받기 십상인 케이스다. 조금 솔직하자면 이 오해에 정면으로 반박하기에는 내심 찔리는 부분이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 데다 공기업에 첫 취업을 했을 때만 해도 내가 원하는 직업 가치관을 알지 못한 채 취업이라는 눈앞의 목표 달성에만 급급한 채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뎠을 무렵엔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누군들 사회초년생 때 직무 적성이나 직업 가치관 따위를 알겠냐마는 나 또한 처음 몇 년간은 그저 가야 하니 날마다 출퇴근을 반복했고 가끔 의도치 않은 야근과 주말 출근도 병행하며 K직장인에 점차 가까워져 갔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용돌이 같은 일들에 맨 몸으로 맞서며 버티다시피 직장에 다녔다. 이렇게 남은 30년을 흘려보낼 생각을 하니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래부터가 큰 명성이나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거나 일로써 사회에 기여하겠다거나 하는 엄청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지만 남은 몇십 년의 삶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생활을 다람쥐 쳇바퀴처럼 굴릴 자신이 없었다. 아침마다 적막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네모반듯한 파티션으로 나누어진 책상에 앉을 때마다 변화를 도모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당시 이십 대 후반이었던 나는 더 이상 무언가에 도전해보지 않고 특별히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의 현실에 순응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그 생각이 나를 바뀌게 하지는 못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다 현재의 삶을 이어가든, 새로운 선택을 하든 살아가는 한 필연적으로 고뇌와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라면 익숙한 힘듦보다는 새로운 힘듦을 택하겠다는 것이 그때의 내 가치관이었다. 이는 그 선택으로 인해 파생된 일련의 경험들을 하고 난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아마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나는 새로운 도전 과제가 생기면 그 목표를 향해 한 발자국이라도 내디뎌봐야 하는 사람이었다. 설령 움푹 파인 물웅덩이를 못 본 채 큼지막한 한 걸음을 내디딘 탓에 신발이 다 젖어버리거나 발을 헛디딜 위험에 처한다고 해도 내처 목적지까지 가보려고 했다. 좋게 말하면 용기와 실행력이 있는 것이겠지만 그 반작용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과 어려움에 직면하고 이를 스스로 헤쳐나가야만 하는 현실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익숙한 일상을 일정 주기로 반복하는 것보다 꽤나 잦은 빈도로 불확실한 상황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두려움과 더 나은 대안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피곤함을 동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얻은 것은 있다. 아니 돈주고도 못 배우는 인생 수업이자 모든 경험은 값지다는 미화된 시선에서 보자면 오히려 얻은 것들이 더 많다. 직업 면에서 보자면 내 적성에 맞는 일,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잘할 수 있는 일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나길 그 분야에 재능이 있는 사람보다 잘하기 어려운 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번의 퇴사와 이직, 프리랜서로 이런저런 일을 직접 해보고 나서야 나 자신과 일에 대한 가치관을 어느 정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머릿속으로만 짐작하거나 상상에 맡긴 채로 몸소 부딪혀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것들이다. 특히나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에 퍽 공감하는 나는 무엇이든 직접 부딪히며 경험으로 체득하는 것이 훨씬 많았다.


취업이나 직업 선택을 앞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제가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어요'가 대표적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가능하다면 최대한 다양한 일을 해보세요.'라고 대답하고 싶다. 스스로에 대해 골몰히 생각하거나 유튜브나 책에서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얻으며 여러 가지 일과 직업에 대해 탐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어떤 묘책을 찾길 바라기보다 뭐가 되었건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훨씬 빠르게 답을 찾을 수도 있다.


관심 있는 업종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하고 싶은 분야의 교육을 듣거나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직접 물건이나 서비스를 팔아보는 것이 실전 경험의 예가 될 것이다. 작은 일이라도 직접 경험해 본다면 그 일에 얼마나 흥미가 있는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분야인지, 잘하기 어려운 일인지 파악하기 쉬워진다. 이것만 해도 나중에 현업에 나가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찾았는데 그 일로 먹고살 수 있을지, 보통의 직장인의 삶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도 괜찮을지 말이다. 만약 직장에 다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면 직장에 다니면서 사이드잡의 개념으로 조금씩 시작해 보길 바란다. 가령 스마트스토어 같은 온라인쇼핑몰을 운영하거나 외부모임에서 경제나 재테크 등 분야의 강의를 하거나 독립출판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직장에서는 하기 힘들었던, A부터 Z까지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면서 주도적으로 일한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의외로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찾으며 본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시간들은 언젠가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그러면 직장을 그만두면 안 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면 퇴사해도 괜찮다고. 퇴사한다고 해서 엄청나게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직장인이 아니라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 굶어 죽는 것도 아니다. 물론 직장인이라는 이유로 얻는 것들이 분명히 있고 그 반대의 측면도 존재하기에 이러한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원하는 바대로 밀고 나가보길 바란다. 회사 밖에서도 생각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수도 있다.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도 괜찮다. 직장인이라는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점차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그만큼 일의 의미, 직업의 종류도 하루가 다르게 다양해지는 시대다.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나가기 전 주저하는 이들에게 작은 용기와 격려를 전하고 싶다. 결국엔 우리는 모두 나다운 일로 살아갈 수 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사회초년생을 지나 다양한 직업을 거쳐온 나는 성실과 근면이라는 무기에 모든 걸 맡겼다. 직장생활을 관두고 프리랜서로 일할 때조차 여러 일을 동시에 하며 일상을 포기하면서 일하는 습관이 반복됐다. 직장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불안감이 나를 더 일에 매몰되게 만들었다. 집에서 일하던 때에도 고즈넉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서 '내가 선택한 일이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늘 일과 연결되어 있는 일상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우연히 새로운 고객이 일을 맡기면 입소문이 났나 싶어 뿌듯해하며 최대한 빠르게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늘 피곤해하면서도 휴일에도 일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일과 나를 동일시한 지난 시간들을 통해 깨달은 바는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행복의 핵심은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즐거움과 성취와 보람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삶이다. 강점을 발휘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행복의 기본 수준을 점차 끌어올릴 수 있다.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보통의 사람은 남이 만든 파도에 몸을 싣지만, 특별한 사람은 내가 만든 파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운다. 우리는 누구나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나 또한 앞으로 다가올 예상치 못한 파도에 맞설 생각에 지금도 두렵다. 하지만 넘실대는 파도가 몰려올지라도 내가 탄 나룻배를 더욱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파도에 올라탈 것이다. 예측불가능한 미래를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디자인해갈 것이다. '나다운 일'을 발견하고 도전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길 바란다. 그 과정이 뿌리가 더 굵고 단단한 사람으로 자라기 위한 나이테를 만드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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