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을 안정이라 느끼는 역설에 대하여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혼자서 이런저런 일을 벌인 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나는 취업준비생들의 자기소개서를 첨삭하고 종종 기사를 쓰며 프리랜서 번역 일을 이어갔다. 평일 저녁에는 아이들의 독서 교육 화상 수업을 했다. 수업은 오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이어졌기에 평일 저녁에는 약속을 잡거나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평일 저녁의 자유로움을 누리는 것 못지않게 일을 할 때 자율성과 독립성이 꽤나 중요한 나로서는 이러한 단점이 상쇄될 만큼 지금의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직장에 다니면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진짜 자신의 자아는 사회적인 가면이라는 미명 하에 진짜 자아를 적당히 숨긴 채 '같이 일하기 좋은 동료'라는 필터를 스스로에게 씌우고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9-6까지 꼼짝없이 묶여있어야만 한다. 사무실 안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적막하고 고요하게 보이지만 실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모두 저마다의 고민과 생각, 미묘한 감정싸움,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석하는 회식 자리와 같이 다양하고도 많은 내적 갈등과 번민을 마주해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직장인이라면 으레 누구나 겪는 상황과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십 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5년 여동안 나름대로 다양한 회사, 직무에서 일해온 나는 분명히 깨달은 바가 있다. 사무실에서 같은 상황과 환경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유독 다른 사람들보다 사람 간의 감정에 민감하고 주변 분위기에 쉽게 동요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 옆 자리 전화벨 울리는 소리, 내 자리 뒤에서 모니터에 슬쩍 눈길을 주고 가는 이들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미세한 불편함을 느꼈다. 이 같은 작디작은 불편한 감정이나 민감성을 굳이 남들에게 티 내지는 않았다. 이러한 나의 예민함을 의식적으로 표현하지 않기 위해 긴 시간 노력해오다 보니 타인이 보는 나는 오히려 어떤 상황 변화나 감정에 무딘 사람이 되어있었다.
어떤 면에선 남들에게 이렇게 인식되는 것이 편할 때도 있었다. 일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인 직장에서는 내적인 감정을 많이 드러낼수록 스스로에게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그간의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나는 주변인들의 움직임과 사무실 내 소리, 알게 모르게 생기는 파벌 싸움에 따라 묘하게 달라지는 분위기 같은 것들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못 들은 척, 못 느낀 척을 해야만 했다. 아니,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금 더 편해지는 방법을 찾다 자의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다. 이처럼 남들보다 조금은 민감하고 예민한 성격 탓에 직장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일들에 맨 몸으로 맞서야 하는 날들이 수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 직장생활을 하며 줄곧 나를 따라다닌 이런 류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퍽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의 부딪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교육, 고객 응대, 고객 관리를 해야 한다 점에서 서비스 업무에 가까웠지만 직장생활에서 마주하는 사람관계의 힘듦에 비하면 난이도가 현저히 낮았다. 간혹 자기소개서 첨삭을 맡긴 고객 중 요청사항이 지나치게 많다던가, 전달한 결과물에 대한 불만족으로 강경하게 환불 조치를 요구하는 고객도 있다. 이런 고객을 만났을 때는 힘들기도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고객은 직장과 달리 계속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만족한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고 다시 서비스를 해드리거나 할인 혜택을 주는 등 다른 방법으로 상쇄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다. 불만 고객의 수가 현저히 많다면 서비스에 문제가 있거나 서비스에 대한 고객 만족도 측면에서 문제가 되겠지만 그 빈도가 그리 높지 않다면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주제로 화상 교육을 하는 것은 사람을 대면한다라는 것보다는 아이들로부터 에너지, 활력 비슷한 것들을 얻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비록 화면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아이들과 소통해야 했지만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과 활기는 나에게도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간 직장에서 좋은 동료, 선배들을 많이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못지않게 배우고 싶지 않거나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류의 선배들을 봐왔기도 했다. 자신의 일을 뻔뻔스럽게 후배에게 떠넘기거나, 연차나 지위를 무기 삼아 기대 이상의 대우를 받길 원하는 선배 등 그 부류도 다양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게 수업을 할 때는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린 어른에게서 찾아보지 못한 순수함이 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개중에는 10분이라는 수업 시간 동안 통 집중하기 어려워하거나 주마다 책을 잘 읽어오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어른들을 대하면서 오는 스트레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는 여전히 아이였다. 대학시절에도 지역아동센터와 중학교 방과후 학교에서 영어, 수학 과목으로 교육봉사활동을 2년간 해왔던 나였다. 대학생 때는 봉사나 모임 같은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일련의 활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용돈벌이 삼아 해온 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나름대로 적성에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직장인의 월급에 비하면 크지 않은 수입이었지만 재택근무를 하며 하루 5시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서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하는 일 치고는 괜찮았다. 정년이 보장되어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회사에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강생이 있다면 계속해서 일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는 마음 한 구석에 묘한 안정감을 심어주었다. 무슨 일이건 내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고 나 또한 그 일이 퍽 잘 맞았을 때의 안도감이었다.
직장에 다니지 않고도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화상 교육뿐만 아니라 자소서 첨삭, 번역 일 같은 부수적인 일들도 같이 하고 있었기에 불안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수업을 하지 않는 오전 시간에 그 외의 일들을 하면 되었고 그래도 시간이 남을 때는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당장에 돈이 되는 일은 아니다. 그저 전부터 꾸준히 좋아하는 일이자 여러 복잡한 일들에 파묻혀 있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하는 행위였다. 지금 당장 수입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아니 어쩌면 미래에도 내가 쓴 글로 조금의 돈도 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계속 써야겠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했다. 그동안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들, 평소에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언어의 형태로 표현해 낸다는 데 즐거움이 컸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그 시간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어떠한 행위에 몰입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기쁨을 한 번이라도 느껴본 이는 그 느낌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쓸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는 대작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쓰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조금씩 천천히 글과 기록을 쌓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다. 그 기록을 누군가가 읽어준다면, 글을 읽은 누군가에게 작은 의미로나마 닿을 수 있다면 큰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나저러나 여러 개의 직업으로 현재의 생계를 해결하고 머리를 환기하기 위한 소소한 취미생활을 향유하는 한편, 창업이라는 새로운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첫 회사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결심하고 업계와 직무를 바꾸었을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창업이라는 꿈이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막 직장생활 4년 차에 접어든 터라 경험이 너무 적었고 창업을 하기에는 용기도, 돈도 없었다. 무엇보다 창업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을 뿐, 창업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알게 되었느냐.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나마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혹은 필요로 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 만족시켜 줄 수 있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후에도 제품이나 서비스의 시장성을 검증한 후에 시장성이 검증되었다면 가장 효과적인 홍보와 마케팅을 거쳐 신규 고객을 유치하거나 충성 고객의 이탈을 방지하고 고객 저변을 넓히는 것이 필요했다. 이 과정까지 가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부지원금이나 기업에서 투자를 받아야만 했다. 그럴싸한 기술력이나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매출을 만들어내지 못한 예비 창업자에게 처음부터 투자할 기업이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시장성이 있을 법한 아이디어와 이를 검증할 만한 시제품, 대표와 조직 구성원의 열정 같은 것들로 창업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정부에서 창업지원금을 받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지역의 유망한 청년 창업기업의 발굴과 성장, 투자 유치 지원을 위해 매해 수많은 창업 지원 사업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소기업벤처부에서 운영하는 'K-Startup'이라는 창업지원포털 사이트에 가보면 꽤나 잦은 주기로 다양한 창업지원 프로그램 신청 공고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간 창업지원 프로그램 중 가장 대표 격이자 매년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는 프로그램은 예비창업패키지와 초기창업패키지였다. 그중에서도 예비창업패키지는 혁신 기술과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예비창업자에게 사업화 자금, 창업 교육, 멘토링을 지원해 성공적인 창업을 돕는 지원 사업이다. 예비창업패키지를 통해 창업에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토스, 마이리얼트립, 아이디어스 등이 있다. 이들 창업자들도 창업을 고민하고 준비할 당시에는 회사가 누구나 한 번쯤 사용해 봤을 법한 거대 플랫폼으로 성장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무엇보다 예비창업패키지의 가장 큰 장점은 사업화 자금 지원이다. 시제품 제작, 마케팅, 지식재산권 출원 및 등록 등에 소요되는 사업화 자금을 최대 1억 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예창패를 지원받은 기업의 후기를 보면 평균적으로는 5천만 원 정도를 지원받는 듯했다. 창업을 위해서는 시장에 없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도 물론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금일 것이다.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사람들에게 홍보, 판매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마케팅 비용이 필요하고 온온프라인에 관계없이 스토어를 개설하거나 사무실 임대료가 들어간다. 1인 기업이 아닌 이상 인력을 채용하려면 인건비도 든다. 언젠가부터 무자본 창업이라는 말도 많이 들리지만 정말 특수한 케이스가 아닌 이상, 창업에는 적지 않은 자금이 들게 되는 것이다.
예비창업자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인 자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비창업자패키지이다. 그 외에도 BM 고도화, MVP 제작 등 창업과 관련한 교육을 제공받을 수 있고 다양한 멘토링과 네트워킹 서비스도 받을 수 있기에 합격하기만 하면 창업이라는 꿈의 씨앗을 키워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었다.
나 또한 스타트업으로 이직 준비를 할 때 즈음 예비창업패키지를 처음 알게 된 후로 언젠가 도전해 봐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마음속 한편에는 언젠가 창업의 꿈을 이루리라 부푼 다짐을 했던 나는 본격적으로 예비창업패키지, 청년창업사관학교, 청년창업 지역정착 지원사업 등 다양한 창업 지원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K-Startup 홈페이지와 유튜브, 블로그에서 지원 자격과 사업계획서 양식, 예비창업패키지에 합격한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요즘엔 조금만 서치 해보면 사업에 대한 정보는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었지만 정작 내가 어떤 분야에서 창업을 할 것인지, 머릿속에서 맴도는 몇몇 아이디어를 가지고 수익화를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특히나 예비창업패키지는 혁신적인 기술과 사업모델(BM)을 보유한 예비창업자의 성공 창업을 지원하는 것이 사업목적이었기에 기술력을 가진 창업 아이템을 개발하고 사업화를 위한 차별성과 수익모델이 있는 것이 유리했다. 그러려면 간단하게라도 MVP로 구현할 수 있는 웹이나 앱을 개발할 수 있는 개발자 등 팀원을 모집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1인 지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합격자들을 보면 팀 단위로 아이디어 구체화, 사업계획서 작성, 서류와 면접 심사를 거쳐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나는 혼자서 고민한 사업 아이디어도 구체적이지 않을뿐더러 팀이 꾸려진 상태도 아니었다. 자연히 예비창업패키지는 내년을 기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하고 싶다는 의욕만으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매년 다양한 창업 지원 기업을 모집하고 있고 연중에도 창업 멘토링이나 교육 프로그램이 많았기에 새로운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프리랜서이자 1인 기업가로 일하며 창업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지만 여전히 미래의 생계에 대한 대안 마련이라는 숙제가 남아있었다. 단순히, 지극히 낙관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지금 하는 일을 앞으로 몇 년간 더 지속한다고 해도 혼자서 먹고사는 데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더구나 재택근무가 가능한 만족스러운 환경에서 최소한의 스트레스로 쾌적하게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만 일하고 말 게 아니라면, 현대사회를 소위 100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미래의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기에 최소한 60세까지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었다. 삼십 대인 내가 60대가 될 30년 뒤 에는 70세까지 일하게 될지도 모르는 때가 도래할지도 몰랐다. 갑자기 투자에 성공한다거나(투자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나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인지는 모를 일이다) 막연히 꿈꾸는 사업에 성공해 파이어족이 되어 이른 경제적 자유를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으로 이어지자 앞으로 30년 동안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따라붙었다. 회사 안과 밖의 일을 구분하지 않고 가능한 한 적성과 흥미에 맞는 일, 그리고 생활을 영위하는 데 경제적으로 빠듯하지 않을 정도의 수입을 벌 수 있는 일 사이의 타협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불가능한 조건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무리하게 애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더더욱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고민을 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류의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미래에 대한 불안정을 동반한 현재, 순전히 정서적 안정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나는 제법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회사에 다니던 때에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필요 이상의 책임감의 막중함, 서로 다른 생각과 성향을 가진 사람 관계에서 흔히 벌어지는 줄다리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평온한 상태에 이르게 했다. 보통의 직장인이 겪게 되는 일련의 크고 작은 이들이 예전의 사회초년생 시절에는 맨 몸으로 서 있는 내게 예고 없이 들이닥친 파도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그 파도의 출렁임이 고스란히 각인되어서일까. 잔잔한 일상과 평온한 내면으로 생활할 수 있음에 안도감을 느꼈다.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가끔 친구와 맛있는 것을 먹고 소소한 취미생활을 배울 수 있는 정도의 생활로도 만족할 수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다른 가치를 더 우선시했을 것이었다.
평온함을 얻은 대신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고민과 불안정한 수입은 마땅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이를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삶이었다. 당분간은 나에게 주어진 몫을 감당해 볼 작정이다. 누군가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지나친 낙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모습이 저마다 다르듯 삶의 형태도 제각각 다른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한 시간은 흐른다. 천천히, 느리더라도 발을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조금 더 스스로에 맞는 삶의 모양을 찾아가고 디자인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