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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Apr 23. 2024

생업은 다 3D입니다

우리의 일과 삶

'일'을 빼놓고 인간의 삶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직업'의 사전적 정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직업은 한 인간의 정체성, 존재적 의미를 말하기도 한다. 전자를 생업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본업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일을 하다 보면 일이 직업 그 자체라기보다 생업의 의미로 와닿을 때가 많다. 일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거나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기보다 부지불식간에 생업의 나락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당장 생존을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일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겠지만, 결국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생계유지를 위해서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에서도 욕구의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하위단계에서 상위단계로 계층적으로 분류하였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갈수록 상위에 위치한다.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다음 단계의 욕구가 발생하며 점점 높은 단계로 성장해 간다. 여기서도 생존의 동기가 가장 먼저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직업이 존재한다. 평범한 직장인, 사업가, 자영업자, 전문직, 예술가, 육체노동자 등 종류도 수도 무궁무진하다. 모든 직업인들은 그 일을 원해서 하게 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떠한 일로 생계를 해결하는 순간부터 마냥 그 일이 좋고 즐겁지만은 않으리라. '좋아하는 일 혹은 취미를 직업으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끔 우리는 해본다.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면 이러한 삶은 사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가령, 여행을 다니며 국내외 아름다운 곳을 영상으로 찍어 올리는 여행 유튜버나 카메라를 좋아해 취미로 시작한 사진이 직업이 된 사진작가, 새로운 제품과 사업을 만들어 세상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업가, 작가나 화가처럼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취미가 업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항상 행복할까? 물론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액수가 크건 작건 관계없이. 대부분의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 일로 적어도 9 to 6 동안 일에 묶여있으며 이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밤낮없이 노동에 투입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이런 사례를 보면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취미가 업으로 이어졌다면 그저 취미로 그 일을 할 때보다 마냥 행복하진 않을 거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일'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효용을 제공하거나 누군가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고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대가를 받는 일이다. 최소한 노동에 대한 대가만큼의 효용을 주어야 하고, 상대가 그 대가를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느낄 정도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문제 해결을 의뢰한 사람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당신에게 해결을 요청했을까? 항상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대신 해결하는 것은 어렵다. 클라이언트의 입장에서는 시장에서 비슷한 가격대 또는 더 저렴한 가격으로 현재와 유사한 퀄리티의 서비스를 손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의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냉정하게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이다. 이 상호 이해관계의 메커니즘의 전 과정이 일의 시작과 마무리를 나타낸다. 이는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기도 하다.


취업 전, 전문직 시험 준비를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타이밍 앞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싶었다. 그때 한 현직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순전히 높은 수입이 목적이라면 전문직 시험 준비에 돌입할 시간과 노력으로 개인 사업을 하는 편이 낫습니다. 철저히 경제적 효율성으로 따져본다면 전문직 시험 준비는 그다지 효율적인 방향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무조건 경제적 효율성을 따져야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왕이면 열심히 노력하고 시간을 투자한 만큼의 정신적, 물질적 가치가 있었으면 했던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절대적 금액으로 보면 전문직은 돈을 많이 벌 것이다. 또래의 직장인들보다 못해도 2배 이상 버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또래들보다 3배 일하면서 2배를 받는다면 이게 정말 효율적인 방향일까? 라며 질문을 던지는 현직자 분도 계셨다.


그분이 존경하던 한 선배와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선배는 일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술도 도 잘 먹고, 골프도 준프로급 실력자인 그야말로 사기캐릭터였다. 법인에서도 미래가 보장된 분이었고 흔히 말하는 대기업급의 메가 클라이언트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 야근을 마치고 가볍게 술 한 잔한 적이 있는데, 꽤 늦은 시간임에도 그 메가 클라이언트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급하게 들어가 봐야 한다며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자리를 떴다.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일을 한다면 누구라도 소위 말하는 갑질 혹은 컴플레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고민 끝에 결국 나는 취업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껏 여러 곳의 직장을 거쳤다. 근로자로의 노동에서도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발견하거나 자아실현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웠다. 물론 일을 하면서 맡은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무리했을 때, 팀 단위로 좋은 성과를 냈을 때는 나름의 성취와 보람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고 나의 역할로 세상이 어떻게 아귀를 맞춰 돌아가는지도 어렴풋이 볼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생활의 8할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곤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그렇다. 운이 좋게도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의 자아실현에 조금은 가까워져 가는 일들을 하게 되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내가 원하는 초점과 무게를 맞춰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도 같다. 계속 뭔가 허전하고, 고민하게 되고, 다른 무언가를 찾거나 더 원하거나..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소한 경험이나 일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부딪혔다. 당장에 뭔가를 바꾸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작은 경험들이 내 안에 쌓였을 때 근미래에 뭔가를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수월해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되고, 다양한 일의 종류도 알게 되면서 이 둘을 매치하는 데에 예전보다는 시간과 에너지가 적게 들었다. 이것만 해도 큰  발전이라고 스스로 여겼다.


요즘의 내가 하는 일들 중 하나는 다양한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에 따라, 클라이언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류의 일을 한다. 클라이언트와의 약속 시간, 결과물의 전달 기한을 엄수하는 것은 필수이며 클라이언트마다 커스터마이징 된 서비스를 제공했을 때만 고객만족을 가져올 수 있다. 때로는 내 잘못이 아님에도 불만 섞인 피드백을 받아야 하고 늦은 밤까지 어떤 요구를 하는 고객도 있다. 그래도 결과가 좋았을 때 좋은 피드백을 아끼지 않는 클라이언트도 있기에 균형이 맞아간다.


어떤 면에서 생업은 모두 3D다. 더럽고(Dirty) 위험하고(Dangerous) 어려운(Difficult) 일에 누구나 이따금씩 휘청인다. 그 정도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큰 맥락에선 동일하다. 아무리 좋은 직업이라도, 진정 원해서 한 일이라도 3D의 순간은 늘 존재한다.


생업이 3D라고 해서 우리는 절망에 빠져야만 할까. 조금만 시각을 바꿔 생각해 보자. 노동을 하면서 겪는 3D의 순간은 한 마디로 문제 상황이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직업인으로서 우리는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기에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만 한다. 처음엔 막막하고 고민되고 주저앉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 처음을 잘 해결한다면? 아니, 잘 해결하지 못했더라도 그 처음에서 무언가를 배웠다면 어떨까? '다음 문제에서는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활용해야겠구나' 라든가 '이번 같은 일은 비슷한 업무 처리 사례를 충분히 서치하는 게 중요하다'와 같은 피드백을 얻었다면 충분할 때도 있다. 그 피드백을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 문제 상황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자신의 날을 다듬고 실력을 갈고닦는 것이다.


앞으로 생을 살아가는 한 우리의 생업도 계속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생업의 3D 순간을 맞닥뜨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자신의 무기를 만든다면 어려움의 순간이 조금씩 줄어들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삶과 일은 어렵다. 삶과 일이 일치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뭔가를 배우고 깨닫는다. 그러니까 지금 하는 일을 통해 무럭무럭 나를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하루의 밀도를 높여보자. 똑같이 일터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더라도 더 잘 자라는 방법은 분명히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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