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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둥빠 Jan 11. 2021

철밥통 공공기관의 실상

워라밸은 불가능하다.

우여곡절 끝에 A 공공기관에 취업했다. 언론과 주변에서 공공기관은 안정적이라고 해서 들어갔다. 워라밸(워크-라이프 밸런스)을 추구하고 싶었다.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백수였기 때문에 다른 기회들은 다 걷어차고 일단 가장 먼저 최종 합격한 A 공공기관에 입사했다. 고시와 미국 유학에 실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이름이 조금 알려진 회사에 취업하니 기분은 좋았다.    

 

부푼 꿈을 안고 신입사원 교육에 갔다. 30여 명의 동기들이 있었다. 신입사원 교육은 한 달 동안 진행한다고 했다. 교육 스케줄을 봤다. 스케줄이 조금 이상하다. 아침 7시 30분 ~ 8시부터 시작해서 밤 10시 30분~11시까지 교육이 잡혀 있었다. 심지어 토요일에도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교육이 있었다.     


평일에는 밤 10시가 넘어서 교육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12시가 거의 다 되었다. 씻고 자기 바빴다. 분명 공공기관은 6시에 정시 퇴근한다고 들었다. 나보다 1년 일찍 취업한 내 엘리트 동생도 B 공공기관을 다니는데 거기는 대부분 정시에 퇴근했다. 근데 우리 회사 교육 담당자는 우리 동기들이랑 같이 밤까지 계속 같이 있었다.


뭔가 좀 이상했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신입사원 교육이라 조금 힘들게 하는 거고 부서 배치를 받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교육을 받았다. 그렇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드디어 힘들었던 신입사원 교육이 끝나고 부서 배치를 받았다. 첫날, 저녁 6시가 되었는데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나는 신입이니 일단 할 일도 없고 들어가라고 하셨다. 눈치는 보였지만 일단 가장 먼저 퇴근했다.


부서 배치 후 2~3주가 지나자 나도 일찍 퇴근할 수는 없었다. 주변을 보니 다들 퇴근을 안 한다! 실제 업무도 많아 보였다. 사람들은 항상 바빴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녁밥도 안 먹고 일하다가 저녁 8시에 퇴근하려고 가방을 싸면 주변에서 눈치를 줬다. 왜 이렇게 일찍 들어가냐고.


벌써 들어가요?  


이런 말을 몇 번 들으면 퇴근을 할 수가 없다. 부서 배치 이후 적응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밤 12시 새벽 1시까지 일하시는 분들도 많았다. 나도 한 번은 5끼를 연속으로 굶고 일한 적도 있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밥을 못 먹기 시작해서 일요일 밤 11시까지 밥을 한 끼도 못 먹고 일했다. 일찍 끝날 줄만 알았던 일이 계속 안 끝나서 끝까지 밥을 못 먹었다.


이것만 끝내고 집에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점심을 안 먹었는데 안 끝나고, 저녁 전에는 끝나겠지 하고 밥을 안 먹고 일하다 보니 밤 12시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주말 내내 밥을 못 먹고 일했다. 물론 중간에 회사 탕비실에 있던 견과류나 과자를 주워 먹긴 했다. 그래도 뭔가 잘못됐다.


화장실도 못 가고 하루 14~15시간을 일하는 건 다반사였다. 공공기관은 분명 6시에 칼퇴한다고 해서 들어왔는데 칼퇴는커녕 야근은 일상이고 주말 출근도 종종 했다. 바쁜 부서는 주말에도 거의 매일 나왔다. 다행히 나는 덜 바쁜 부서에 배치되어서 그 정도였다. 이 회사에서는 워라밸은 불가능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급여였다. 내 통장에 찍힌 월급은 219만 원! 언론에서 공공기관은 급여도 많이 받고 퇴근도 빨리 한다고 그랬는데... 분명 철밥통이라고 했는데... 이상했다. 시급을 계산해보니 7,000원 정도였다. 최저임금만도 못한 급여를 받고 있었다.


공공기관도 야근이나 주말 출근을 하면 수당을 더 받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공공기관은 그런 게 아예 없다. 당시에는 성과연봉제라 순수하게 월급과 연 3회 지급되는 성과급만 받았다. 그 외의 수당은 일체 없었다.


공무원과는 다르다. 공공기관 직원도 공무원처럼 별도의 공무원 연금이 있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공공기관 직원은 공무원이 아니라 일반 민간기업 회사원과 똑같다. 공무원 연금은 없고 국민연금만 있다.

  

그때 깨달았다. 언론에서 공무원의 근무환경이나 보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부담스러우니 만만한 공공기관만 열심히 욕했던 것이다. 입사 이후 친구들과의 사이도 안 좋아졌다.      


공공기관인데 뭐가 그렇게 바쁜 척하냐?
퇴근하고 밥이나 먹자고 하는데 왜 못 나오냐?
급여가 그렇게 적은 게 말이 되냐?
뒤로 더 받는 거 있지 않냐?

내 통장에 찍힌 실수령 급여를 보여줘도 안 믿었다. 뒤로 더 받는 게 있지 않냐고 했다. 뒤로 더 받는 거라고는 고객들의 욕 밖에 없었다. 정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공공기관과 내가 경험하고 있는 실제가 너무 달랐다. 심지어 공무원이셨던 부모님조차 내가 회사 이야기를 하면 이해를 못 하셨다. 그게 말이 되냐고.


그 와중에 회사에서 넘버 3 안에 드는 또라이 상사를 모시게 되었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업무 강도, 급여에 이어 사람 스트레스까지 회사에서 겪을 수 있는 안 좋은 3가지를 모두 겪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평생 이런 직장을 다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내 회사 선택은 실패했다. 내가 추구했던 직장의 조건과 하나도 맞지 않는 곳이었다. 워라밸도 안되고 그렇다고 급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사람 스트레스까지 있었다.


특히 워라밸이 직장 선택 최고의 기준이었는데 그 기준에 가장 맞지 않았다. 이직을 결심했다. 입사 후 1년 정도 시점이었다. 지인들이 다니는 회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분명 사기업이 공공기관보다 업무 강도도 세고 힘들다고 들었는데 들어보니 아니었다. 오히려 사기업이 워라밸을 추구하기에 좋은 곳들도 많이 있었다.


지인들도 이해를 못 했다. 무슨 공공기관이 그러냐고 의아해했다. 마침 대학원에서 야구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하던 형이 본인 회사가 괜찮다고 했다. 경력직도 뽑는단다. 석사 2년, 직장 1년 경력을 인정받아 경력직 대리로 입사가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아는 외국계 회사였다. 회사도 강남에 있고 6시 칼퇴에 쓸데없는 페이퍼 워크도 별로 없다고 한다. 야근은 1달에 1번 정도 할까 말까라고 했다. 내가 꿈꾸는 삶이었다.


그 형이 준비하라는 대로 이력서를 준비하고 지원했다. 외국계 회사답게 시스템으로 미국 본사에 직접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이제 면접만 남았다. 그 형은 이미 7년 차 과장이었고 회사 내에서도 어느 정도 네트워크가 있었다. 면접에 들어가는 팀장들한테 얘기해줄 수 있다고 했다.


원래 잘 떨지 않는 스타일이라 면접은 문제없었다. 이 거지 같은 공공기관에 멋지게 사표를 던지고 외국계 회사에서 워라밸을 추구하며 일하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나가는 게 맞나? 아직 입사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혹시 이 회사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도 않고 그냥 퇴사하는 게 아닐까?
나는 이렇게 첫 직장 생활을 실패하는 걸까?


몇 주 동안 고민했다. 면접만 보면 이직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그 싫었던 공공기관에 도대체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렇게 주저하고 있는지... 그냥 다른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미련이 남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내와도 계속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내 결정을 따르겠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란다. 내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으라고 한다.


고민의 나날들이 연속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상담을 받을 수도 없었다. 온전히 제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였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제대로 경험을 해보고 그만두자.
아직 내가 이 회사를 제대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잖아.
회사에서 큰 사이클은 한 번 경험을 해보자.
제대로 경험을 하고 그래도 아니면 그때 옮기면 되지.


나는 결국 이직을 하지 않았다. 내 이직을 도와줬던 형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조금 더 다녀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 형도 내 결정을 존중해 줬다. 당시 내 결정이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때 이직을 했더라면 분명 다른 길을 가고 있었을 거다. 정말 워라밸을 추구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 이직을 선택한 나 자신을 원망하며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도 내가 다니는 공공기관은 워라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해보고 후회하라!


행동을 못 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이다. 일단 행동을 해야 어떤 결과가 나온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당시에 이직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다니는 회사를 조금 더 제대로 알아보려는 행동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니 이직을 준비하던 시기에 가졌던 생각과 많이 다르진 않다. 지금도 이 회사의 진짜 모습을 내가 제대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직장 생활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이직을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고? 주변의 직장인들을 보니 내가 어떤 회사를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회사를 어떻게 다니느냐가 중요했다. 아무튼 내 이직 도전은 실패했다.

공공기관에 대한 이미지는 산산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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