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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Aug 06. 2023

주저흔

주저흔#5

제 입에도 가시가 돋았습니다.

아버지는 엄마와의 대화를 회피했고 엄마는 집요하게 과거의 상처를 아버지께 쏟아부었습니다. 고성이 오가는 틈 사이로 간혹 무언가 떨어지거나 부딪히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방으로 들어가 귀를 막아도 보고 노래를 크게 틀어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큰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저도 모르게 두 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더라고요.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쿵하고 떨어지는 심장을 붙잡는 심정으로 숨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바람 잘 날 없는 하루와 하루가 이어졌고 어느 순간 저의 입에서도 날카로운 말이 나왔습니다. 부모님도 자식들 앞에서는 최대한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족 여행을 계획하다가도, 형의 진학 문제를 논의하다가도, 심지어 고장 난 가전제품을 바꿔야겠다는 대화에서도, 가족 간의 모든 대화는 아버지가 엄마에게 어떤 정서적 흉터를 남겼느냐에 대한 진술로 끝이 났죠. 저도 점점 말을 줄였습니다. 대화를 하는 것이 무서워졌어요. 엄마가 아버지에게 쌓인 그 한을 씻어내지 않으면 가족 간의 대화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집이 불편해졌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도 아버지에 대한 한을 저에게 쏟아내셨어요. 혼란스러웠습니다. 제 기억에 아버지는 자상한 사람인데, 아버지와 엄마만이 아는 이야기에서의 아버지는 제가 알던 모습과는 꽤나 달랐으니까요.


나는 아버지랑 엄마가 더이상 그만 싸웠으면 좋겠어.

둘다 똑같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는게 얼마나 괴로운줄 알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입힌 사람이 또 다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너무 혼란스러워.


제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마음속 한켠에 끄적였던 제 진심을 부모님이 언젠간 알아줄것이라 생각하며 매일밤 기도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어느 날은 하굣길 버스에서 한 번씩 눈물이 났고 알 수 없는 분노에 반항심도 생겼습니다. 우울이라는 유산이 저에게도 상속된 것일까요. 집에 있는 것이 싫어서 일주일간 가출을 했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등교를 하지 않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어떻게 너까지 엄마한테 이럴수있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자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원망은 점점 저에게로 옮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사춘기가 심하게 왔으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 하셨지만, 이러한 방황이 17년간 지속될 줄 아셨을까요. 저의 일탈은 사춘기의 일탈이 아니라 가족관계에 대한 좌절과 불행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너무 슬펐던 건, 날카로운 말로 엄마의 마에 가시를 던지면서도 냉장고에 엄마의 그림을 붙이며 함께 웃었던 장면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언성을 높이고 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책하며 흐느꼈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참 각별하셨던 거 같아요."

한참을 가만히 제 이야기를 듣던 상담사가 밝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애정이요? 전 원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엄마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담았던 것이 엄마에 대한 애정이었을 수도 있었을까요. 엄마가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어릴 때는 엄마와 함께 있는 게 너무 좋았던 때도 있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마와 관련된 것이면 제가 더 예민해진 거 같긴 했어요."

매사에 의욕이 없었습니다. 공부도 하지 않았어요. 한 번은 운동부에 다니는 옆반 친구와 코피가 터지도록 싸운 적도 있었습니다. 운동밖에 안 한 자신보다 제 성적이 더 낮다고 놀려 되는 모습에 화가 나서 달려들게 된 것이죠. 바닥을 쳐다보면서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그때 즈음이었던 거 같아요. 잦은 결석으로 출석 일수를 겨우 채워 중학교를 졸업할 순 있었지만 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뭐?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이놈의 자식이!"

부모님은 역정을 내셨어요. 하지만 저도 물러서진 않았습니다. 그만큼 저의 가시도 부모님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엄마, 아버지의 전쟁에 저도 참전하기로 결정한 거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결국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엄마는 아버지의 양육태도를 탓하셨고 한 번도 저에게 화를 내지 않으셨던 아버지도 언성을 높이셨죠. 제일 화가 났던 건 제 자신이었어요. 어느 가정이건 사연이 다 있지만 모두가 저처럼 어긋나지는 않잖아요. '왜 나는 이렇게 나약할까.'에 대한 생각과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더욱 제 자신을 미워했던 것 같습니다. 날카로웠던 가시는 방향을 틀어 이제는 제 자신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들. 아빠랑 얘기 좀 하게 문 열어봐."

아버지가 한참전부터 방 문 앞에 서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식탁에 앉아 울고 계시는 엄마의 흐느낌도 제 방안으로까지 스며들어왔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아? 이게 다 아버지랑 엄마때문이라고! 그러니까 내 인생 그만 좀 괴롭히고 내버려둬!"

감정을 토해내듯 악을 지르고는 다시 방 문을 쾅 닫았습니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을 가만히 두면 안된다며 아버지는 문을 두드리셨지만, 이내 엄마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리셨습니다. 그때 제 심장은 미친듯이 뛰고 있었어요. 터져나오는 눈물을 이불에 흠뻑 적시고는 새벽이 오길 기다렸습니다. 당장은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부모님이 거실의 등을 끄고 주무시러 들어가고 나서야 이불을 걷어내고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습니다. 새벽은 모든 걸 선명하게 하는 시간인것 같아요. 아버지와 엄마의 모습도 선명해지고 부모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던 제 모습도 더욱 선명히 떠올랐습니다. 슬픔도, 우울도, 죄책감도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점점 형체를 드러냈습니다. 다시 해가 뜨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웠어요.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을 어떻게 볼지, 혹시 부모님도 저로 인해서 잠을 못이루고 있지는 않을지, 감당하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괴로웠던건 부모님을 향한 원망이였을까요. 아니면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이였을까요.

창문밖 풍경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건, 그날의 새벽은 참 고요했고 파도치듯 일렁이는 건 오로지 제 마음뿐이였다는 것입니다.













잇몸은 부어서 피비린맛이 났고 머리에는 각질이 딱지가 돼서 흩어져있었죠. 며칠 동안 씻지 않았습니다. 몸을 일으켜 물을 제 몸에 묻힌다는 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할 지경이 됐습니다. 아주 옅은 빛이 들어와도 신경질이 났습니다. 방 문고리가 열리는 철컥 소리에도 제 심장은 쿵 하고 떨어졌습니다.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제 목소리와 "공사장에서 일을 하던지, 공부를 하던지 뭐라도 좀 해라."라는 엄마의 말이 서로 뒤엉켜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가족들은 한 달이면 되겠지, 저러다 말겠지 했지만 이런 생활이 벌써 삼 년이 다 되고 있었어요. '누구네 아들은 수시로 어느 대학에 붙었다, 누구네 딸은 유학을 떠났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저는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는 십 대의 마지막을 산송장처럼 날려 보냈습니다. 보다 못한 형도 내 멱살을 잡았습니다.

"너 진짜 미쳤어? 도대체 왜 그래?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저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어디가 아픈 것은 맞습니다. 형은 대가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라고 물은 거겠지만.



아파본 사람만이 같이 아파할 수 있습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해 본 사람만이 움츠려든 그 마음에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런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저도 당시에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보고 강연을 들었지만, 공감이 되진 않았습니다. 착실히 계단을 밟아, 대학을 가고 직업을 가지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동기부여나 자기계발 서적과 강연들. 하지만 저같이 단추를 잘 못 끼우고, 스로를 옭아매며 길을 잃은 사람들, 런 사람들을 위한 강연이나 서적은 많지 않았습니다. 문과나 이과의 갈림길에서의 고민, 지방대에서 서울로 상경하기까지의 과정, 그들의 시련과 극복의 사례는 제 것과는 많이 달랐죠.


약을 거르지는 않았지만 크게 나아지는 건 없었습니다. 가족들과 마찰은 더 심해져 갔고 저는 도태되고 있었어요. 가끔씩은 텐트를 들고 나와서 뒷산 어디든 펴고 잔적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뛰쳐나와 영등포역으로 향했어요. 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 참이었죠.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막걸리 두 통을 가지고 나타난 젊은 남자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린 동 그렇게 둘러앉아 각자 자신의 처지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있는 환경에서 저는 돌연변이였습니다. 튀고, 특이하고, 세상과 섞이지 않는 사람, 한때는 웃기게도 제가 특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이곳의 대다수가 저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고 비슷한 결과를 만들었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찾으러 다니는데도 불고하고 절대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죠. 찾으면 다시 역으로 나오고, 찾으면 다시 나오고, 집보다 이곳에서의 삶이 더 편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새 저도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행동들을 쉽게 하곤 했어요. 어쩌면 저 자신이 너무 싫어서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해의 목적은 자기 처벌 혹은 자신의 힘듦을 외부에 알리려는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창문에 걸터앉았을 때, 누군가 저를 바라봐주었으면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주저흔'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주저하다.'와 '흔적'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혼합되어 의미를 만들어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 전에, 주저한 흔적이 있다라고 하여 '주저흔'입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하나쯤은 주저흔이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마음속에는 분명히 '죽고 싶지 않아'라는 마음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는 죽고 싶어

살고 싶지

         않아


지금 이 진술은, 길을 잃을 때마다 하나씩 그었던 제 주저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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